01 트렌드 –느린 유행, 일본의 선택

빠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나라에서

by KOSAKA

브런치스토리의 키워드 1

1. 트렌드 : 유행을 좇는 나, 유행 속의 나

키워드: 트렌드, 유행, 소비자
주요내용 : 빠르게 변하는 유행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트렌드를 따라가면서도 나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 방법에 대해 탐구합니다.


오사카 우메다의 편집숍에 들어섰을 때였다. 반질반질한 진열대 위에는 한국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는 브랜드가 놓여 있었는데, 로고도 작고 색도 차분했다. 화려함은 없었지만, 묘하게 시선이 갔다. 유행을 선도한다기보다, 그냥 거기에 오래 있었던 듯한 존재감. 나는 문득 물었다. 요즘 일본 사람들은 무엇을 따라가는 걸까?


일본은 한때 ‘유행의 나라’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하라주쿠 패션, 일본 애니메이션, 트렌디 드라마가 아시아를 휩쓸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 이후, 일본 사회는 유행을 소비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일본의 젊은 세대는, 빠르게 트렌드를 좇기보다 그것을 유예하고, 재구성하고, 때로는 ‘일부러 늦게’ 받아들인다. 즉각적인 반응 대신 충분한 관찰과 고민, 그리고 자기화 과정을 거친다. ‘트렌드’보다 ‘취향’이 먼저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Z세대, 그러니까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들 사이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무엇이 유행인지 알고 있지만, 굳이 그것을 그대로 따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 발짝 늦게 다가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어느 순간 인스타그램에서 ‘필름 카메라 감성’이 대세가 되면 누구나 앱을 설치해 효과를 입히지만, 일본에서는 진짜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찾아 중고점에서 구입한 뒤, 조심스럽게 현상소에 맡기고, 인화된 사진을 손으로 넘겨본다. SNS에 올리는 건 그다음의 일이다.


이런 느린 유행에는 나름의 철학이 담겨 있다. 일본 사회는 격동과 성장이 아닌, 정체와 유예의 시기를 길게 겪어왔다. 한때 세계 최고의 경제력을 자랑했지만, 버블 붕괴 이후의 불황은 사람들에게 과잉된 기대보다 안정적인 일상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즉, 반짝이는 성공보다 오래가는 물건,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보다 익숙한 취향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소비 행태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값비싼 브랜드보다, 오랫동안 사용 가능한, 질리지 않는 물건을 택한다. 가령 MUJI(무인양품)나 KINTO 같은 브랜드는 화려하진 않지만,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존재감을 키워왔다. 이들의 디자인은 말하자면 ‘조용한 트렌드’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지만, 쓰는 사람과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유행의 중심에 있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유행 바깥에 머무름으로써 더 오래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일본은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트렌드는 ‘속도’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다. 얼마나 빨리 퍼지느냐보다, 얼마나 깊게 스며들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유행하고 바로 사라지는 콘텐츠나 브랜드가 일본에서는 몇 년씩 사랑받기도 한다.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천천히 음미하는 문화. 일본의 책방이나 음악, 카페, 심지어 도시의 색감까지도 모두 이 ‘느린 트렌드’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라, 시대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불확실한 시대에 사람들은 더 이상 빠르게 성공하거나 눈에 띄는 것을 좇기보다, 자신만의 속도와 감정을 존중받길 원한다. 일본은 그 속도를 일찍부터 선택한 셈이다. 반면 한국은 아직도 ‘가장 빠르게 반응해야 살아남는다’는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이 비슷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시간에 대한 감각이 이렇게 다른 것은 무척 흥미롭다.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건, 일본의 Z세대가 유행을 '되받아칠' 줄 안다는 점이다. 단순히 뒤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트렌드를 ‘재해석’해 자기 것으로 만든다. 똑같은 옷이라도 단추를 하나 다르게 채우거나, 원래의 용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버리는 식이다. SNS에서 발견한 새로운 브랜드도 곧바로 친구에게 퍼뜨리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음미하고 나만의 해석을 덧붙인다. 유행을 따라가기보다, ‘내 방식’으로 다시 쓰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일본식 느린 소비를 마주할 때마다, 그것이 단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느낀다. 그것은 정체성과 관계된 문제다. 무엇이 유행이냐보다, 그걸 내가 왜 좋아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나를 표현하기 위해 트렌드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트렌드를 통해 나를 새롭게 그리는 감각. 일본의 트렌드는 그래서 느리고, 조용하고, 오래 간다. 사람들은 트렌드를 소비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하나의 ‘기억’이 되고, 시간이 흘러도 낡지 않는다.


잃어버린 30년이 일본에 남긴 건 단지 경제의 상처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상의 속도를 줄이고, 감정의 깊이를 되찾게 한 시간이기도 했다. 일본은 빠르지 않지만, 멈추지도 않는다. 그들은 지금도 유행이라는 이름의 강을 천천히, 그러나 자신의 걸음으로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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