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하루였지만, 그 안에 조용한 용기가 있었다.
모처럼 집 안이 조용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아내는 출근했다.
오랜만에 혼자만의 아침이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낮게 깔린 햇살이 거실 바닥에 고요히 퍼져 있었고,
그 위로 내가 걷는 발소리가 괜히 크게 느껴졌다.
책상 앞에 앉았다.
화면을 켜자, 바탕화면 구석에
며칠 전 만들어 둔 ‘이력서.hwp’라는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클릭만 하면 열리는 파일.
그걸 며칠째 바라보기만 하다,
날은 결국 클릭했다.
문서가 열렸다.
하얀 배경에 깜빡이는 커서가 보였다.
한 문장이라도 적어보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내 손가락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이력서를 쓴다는 건
단순히 경력과 자격을 나열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걸어온 시간을 요약해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내 지난 시간을
아직 스스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디부터 적어야 할지 몰랐다.
해왔던 일을 떠올리려 해도
막상 손이 가는 순간 멈춰버렸다.
이걸 적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 질문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꾸 고개를 들었다.
성과를 적어야 하는 항목 앞에서 멈췄다.
생각해보면, 나는 살아남기 위해 애쓴 시간들이 더 많았다.
실적이나 수치보다는 관계 속에서 버티는 게 일이었던 날들이었다.
그걸 몇 줄 안에 담아낼 자신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담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쓰지 못한 채
커서가 깜빡이는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날 이력서를 쓰지 못했다.
아무 문장도 적지 못한 채
문서를 닫고, 저장하지 않겠다는 버튼을 눌렀다.
화면은 닫혔고,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시간은 흘렀고,
방 안의 공기는 조금씩 따뜻해졌다.
밖에서는 누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내내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지금 뭐하고 계세요?’라는 질문이
괜히 머릿속을 스쳐갔다.
예전에는 가볍게 넘기던 말이
요즘은 점점 대답하기 어려워졌다.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왜 이력서를 쓰지 못하는지를
금은 이해하게 됐다.
정리가 안 된 시간은
정리된 문장으로 쓸 수 없다는 걸,
그날 처음 받아들였다.
저녁 무렵, 아이들이 돌아왔다.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의 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력서를 쓰지 못한 날.
그날 나는
지금의 나를 조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면
그 하루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