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는 나만 잘하면 된다며

by 서휘

202X년 겨울이었다.


학생 때부터 대학 졸업까지 쉼 없이 달려왔기에 "올해는 꼭 알바만 하면서 쉬엄쉬엄 보내야지"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잠잠해지나 싶던 코로나가 또다시 확산되던 바람에 알바 자리는 구할 수 없었고, 당장 수업이 끊길 위기에 처하자 얼른 취업해야겠다는 압박감만 날로 커졌다.


4점대 후반의 높은 학점을 유지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공모전 입상이나 자격증 취득 같이 취업 스펙이라 할 만한 것은 부족했다. 굳이 내세우자면 누구나 다 하는 몇 번의 아르바이트 경험과 문서 활용 능력이 전부였다. "꿈이 없으면 공부라도 열심히 하라"는 어른들 말씀처럼 당장 하고 싶은 게 없으니 돈이라도 벌어놔야겠다는 강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십 개의 이력서를 제출하고 입사한 곳은 지방의 한 비영리단체였다. 회사로부터 입사 확정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 "이런 나를 뽑아준다고?"란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신기했고, 과분했고, 벅찼다.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하루 종일 웃고 또 웃었다.


'수능만 치면', '졸업만 하면', '취직만 하면', '결혼만 하면' 같은 말, 많이 들어봤을 거다. 이 말들은 희망고문이고 현실은 정반대라는 걸,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책임과 고통이 따른다는 걸 지난 세월 동안 뼈저리게 느껴왔다.


그럼에도 나는 순진하게 직장생활 역시 나만 열심히 하면 별 탈 없이 흘러갈 거라 착각했다.




여느 회사가 그렇듯, 전 직장은 A, B, C 총 세 개의 팀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주간회의 시간에는 모든 팀원이 참여했다. 나는 A팀 소속이었고 B팀에는 나와 같은 날 입사한 동기가 있었다.


입사 후 첫 월급날, 회의 자리에서 B팀의 선임이 입사 동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씨 첫 월급 받았어요. 모두 축하해 줍시다." 회의실엔 금세 박수와 웃음이 퍼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나 역시 처음으로 월급을 받은 날이었고, 내가 속한 A팀의 직속 선배와 팀장 역시 자리에 함께했지만 끝내 나를 언급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도 오늘 첫 월급 받았어요.'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괜히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요즘 애들은 눈치가 없네" 같은 뒷말이 나올까 봐. 그런 말 한마디로 나의 태도는 물론이고 지난 모든 날들이 평가당할 것만 같아 서운함 따위는 조용히 삼켰다. 이런 일들이 앞으로도 반복되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적응하려 애썼다.




며칠 뒤, B팀의 선임이 나와 동기의 환영회 겸 회식을 하자며 단체 채팅방에 말을 꺼냈다. 선임은 메뉴를 정하는 도중 나를 멘션해 "○○씨, 먹고 싶은 메뉴 있어요?"라고 물었다. 처음으로 직접 의견을 물어준 게 감사하고 반가웠다. 내가 조심스레 메뉴를 제안하자 불과 몇 초도 안 되어 돌아온 답은 이랬다. "어쩌죠, 이번엔 다른 걸로 정했어요. 다음에 ○○씨가 말한 거 먹으러 가죠."


뒤늦게 알게 된 바로는 이미 회식 장소가 입사동기의 의견대로 정해져 있었다. 내 제안은 그냥 예의상 물어본 듯했다. 동기의 의견만 듣고 통보해 버린 그 선임도, 상황을 알면서 귀띔 한 번 해주지 않은 B팀의 직원들도 똑같다고 생각했다.


먹는 걸로 사람 서운하게 하는 게 제일 치사하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 선임에게 잘못 보였거나 동기가 나보다 더 일을 잘하고 싹싹해서 그런 걸 거라고 나 자신을 탓했다.




도저히 혼자 삭이기 어려워 직속 선배에게 지금까지의 일들을 털어놨다. 선배도 채팅방에 있으니 전후 상황은 대강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지, 그 선임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며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조언이 아닌 그를 찬양하는 듯한 칭찬이었다.


"그 사람 일 잘하잖아. 거래처 사람들에게도 이미지 좋고, 다들 그 사람 믿고 일 맡겨. ○○씨가 잘 몰라서 그렇지, 속은 따뜻한 사람이야. 친해지면 좀 나아질지도 몰라. 사회생활이 처음이라 모르나 본데, 사회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어. ○○씨가 우리 회사에 얼른 적응해야지."


그는 당시 맡고 있던 큰 프로젝트를 끝내면 우리 팀의 상사로 올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사람을 사소한 일로 차별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배운 정의, 더 좁게는 이상적인 '어른'과는 너무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 말하고 자리로 돌아오는 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