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만으로도 빛나는.
그대의 찬란함에 대하여.
누군가의 찬란한 시절을 기웃거리다 보면 그 장면에서는 묘하게도 마음에 가시가 돋친 듯 시샘이 자란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자유롭게 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약한 심보다.
그 마음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서, 또 누군가의 글을 통해서, 건조한 마음에 불이라도 붙인 듯이 불길은 쉽사리 잠들지 않고 그의 재능을 온종일 탐닉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그 갈망 자체도 좋았다. 갈망하는 내 모습도 나는 좋았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또렷하게 안내해 준다. 그저 시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불렀을 뿐 나는 그것의 진짜 정체는 나도 아름답고자 하는 갈망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는 박완규 씨의 첫 데뷔무대를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첫 데뷔무대임에도 그 편안해 보이는 표정과 자연스러운 몸짓에, 또 그 예리한 목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몇 번을 다시 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사람이 너무 궁금해져서 수없이 찾아보게 된 결과 내 가슴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맺혔다. 그것은 그의 지금이 찬란했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리라. 그의 데뷔와 공백기가 그것을 알려주었다. 그의 변한 목소리와 외모도 그것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여느 때와는 다르게 그 잔상이 너무도 오래 남아 며칠을 괴로웠다. 아마도 너무 밝게 반짝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빛의 중심을 보고 나면 온통 새하얘진 세상을 맞이하듯이 나도 그랬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괜스레 눈을 비벼보았다.
그의 빛나던 그 중심은 정말이지 내 가슴을 너무도 울린 나머지 새파랗게 흔적이 남아버렸다. 내게도 분명 그 빛나던, 내지는 빛나는, 혹은 빛날 중심이 있을 텐데 이제 나는 모르련다.
내 가슴을 멍들게 한 그는, 한때의 날카로운 여운으로 나를 벴지만, 그 예리했던 절삭보다 지금의 뭉뚝함으로 친 울림이 더 크고 깊었다. 그리고 더 오래 흔들렸다.
그는 결국 본인이 뭉뚝해졌어야만 하는 이유를 그의 삶으로 보여주었고 그의 뭉뚝함은 그것으로 다시 빛나는 것이었다. 전보다 더 빛나는 부활이었다.
힘주어 눌러써서 뭉개진 연필처럼 보였던 그의 한때는, 연필을 깎듯 다듬어 새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것으로 우리는 저마다의 연필을 가지고 쓰는 것일 뿐 그 색과 경도는 큰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다. 부활의 대전제인 죽음. 그의 죽음은 숭고했고 그의 부활은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 셈이다.
죽은 지 수백 혹은 수 천년이 지난 별의 빛을 우리는 이제야 반짝임으로 마주한다. 빛의 정점이자 결정체이며 그 순간의 심지인 빛의 축.
누군가의 빛의 축이 그것은 빛이었다고 평가되려면 그 시절을 지나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살고 있는 순간이 빛의 축이기를 바라는 모순 또한 공존한다.
매일이 빛의 축이 될 만큼 나날이 갱신된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나까지 포화 속으로 걸어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별보다는 촛불 정도에 그치기로 생각을 멈춘다.
별처럼 이미 빛났던 순간을 누군가 아주 먼 곳에서 바라본다면 여전히 빛나는 채로 보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죽은 뒤에라도 그가 살아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랜 반짝임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별이 전해주는 위안이다. 또 때마침 론리나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