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낭도(狼島)
“섬은 작아도,
고요는 언제나 길을 연다.”
낭도에 닿으면
먼저 와 닿는 건 ‘자연이 남긴 모양’이다.
육지에서 보면 작고 아담하지만,
바다 위에서 보면 오래된 전설을 숨긴 섬.
낭도(狼島).
섬의 생김새가 여우를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
이름 속에 담긴 가느다란 곡선과 포근한 그림자처럼,
섬은 늘 고요와 여유를 품고 있다.
전라남도 여수시 낭도리.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길목에
조용히 자리한 작은 섬.
육지에서는 손닿을 듯 가깝지만
섬의 길에 발을 올리는 순간
그 고요는 단숨에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낭도의 하루는 언제나 바람에 실려 온다.
해무가 끼면 길은 흐릿하게 숨어들고,
해가 뜨면 마을의 담장과 숲길은 다시 선명해진다.
오전의 바다는 잔물결로 빛을 흩뿌리고,
해가 기울면 구릉 위에 금빛이 얇게 내려앉는다.
이곳에서는 시간을 시계로 읽지 않는다.
‘고요의 속도’로 하루를 읽는다.
멈춰 서면,
바람은 섬의 언어를 속삭인다.
섬 동쪽 언덕에 오르면
낭도의 지형이 한눈에 펼쳐진다.
멀리 여수가 흐릿하게 보이고
잔잔한 물결이 낮은 숨을 쉬듯 흔들린다.
바람은 세지 않지만
늘 일정한 리듬으로 스쳐간다.
섬은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이 오히려 마음을 환하게 만든다.
구릉을 따라 난 숲길은
늘 고요한 녹색의 터널을 이루며 이어진다.
바람이 지나가면 잔가지는 은은하게 흔들리고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느리게 내려앉는다.
길을 걷다 보면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진다.
낭도의 해안선은 완만하면서도 부드럽다.
만(灣)과 곶, 자그마한 암석지대들이
조용히 물결을 맞아들인다.
물빛은 날씨에 따라
청록에서 은빛까지 다양하게 변하며
섬의 표정을 매 순간 바꾼다.
소리가 큰 파도보다
작고 잔잔한 물결이 이 섬에 더 잘 어울린다.
낭도항은 섬의 중심이자
사람들의 하루가 오고 가는 자리다.
작은 배들이 정박하고
어망이 햇빛 아래 말라가며
섬의 시간이 조용히 흐른다.
바쁘지 않아 더 아름다운 풍경.
사람들의 걸음마저 천천히 이어진다.
전망대에 서면
바다와 마을, 숲과 능선까지 모두 이어진다.
멀리 뻗은 수평선은
섬의 고요를 한층 크게 보여주고,
빛은 바다 위에서 천천히 움직인다.
그 순간,
나는 땅도 바다도 아닌
그 사이의 얇은 경계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위치: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낭도리
지명 유래: 섬의 형태가 여우를 닮아 ‘낭(狼)’자를 사용
지형: 완만한 구릉, 숲, 잔잔한 해안선
명소: 바람마루 언덕 / 숲길 / 해안선 / 낭도항 / 전망대
특징: 조용함, 느린 속도, 수려한 자연 풍광
“고요가 하루의 모양을 바꾸는 섬.”
낭도 사람들은
바람의 결과 물빛의 농도로 날씨를 읽는다.
새벽엔 부드러운 잔물결이 섬을 깨우고,
저녁엔 바람이 항구를 지나며 속도를 늦춘다.
이곳에서 삶은
복잡함보다 단순함이 먼저이고,
부족함보다 충분함이 앞선다.
바다와 구릉, 숲과 마을이
각자의 리듬을 유지하며 하루를 이어간다.
낭도는 계절마다 전혀 다른 표정을 가지지만
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봄 — 연한 안개와 부드러운 물빛
여름 — 깊은 녹음과 청록의 바다
가을 — 금빛 능선과 따뜻한 햇살
겨울 — 잿빛 고요와 붉은 동백
어떤 계절에도
섬은 늘 “고요의 중심”으로 서 있다.
노을이 낮게 펼쳐지면
낭도는 금빛의 실루엣이 된다.
바람은 하루의 끝을 차분히 정리하고
바다는 낮게 잔물결을 남긴다.
“섬은 작아도, 마음은 넓다.”
바다가 속삭이고,
“돌아오는 길이 있다는 건
그곳이 오래 기억된다는 뜻이다.”
섬이 조용히 답한다.
낭도의 밤은 고요하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는
오래된 숨결이 은은히 이어진다.
“섬은 잠들지 않는다.
고요의 품을 안고
또 한밤을 지켜낸다.”
낭도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섬사람들끼리만 조심스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모양만 남아 바닷가에 덩그러니 놓인 한 바위.
사람들은 그 바위를 ‘매듭바위’라고 불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마치 묶어두기라도 한 듯
고요가 그 근처에서만 유독 무겁게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옛날, 낭도의 바람은 지금보다 훨씬 거칠었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람이 섬을 헤집으며
바다로 나간 배를 되돌려보내고,
집집마다 창문을 뿌드득 흔들었다.
그 바람 때문에 섬사람들은
멀리 사는 이들과 오랫동안 서로를 찾지 못하기도 했고,
한 해 농사보다 바람을 읽는 일이 더 어려웠다고 했다.
그 무렵, 낭도에
‘바람을 다스릴 줄 아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이름도 알 수 없고,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은 그를
“바람이 찾아오는 길을 아는 사람”이라 불렀다.
어느 날, 폭풍처럼 몰아치던 큰 바람이
낭도에 일주일 동안 멈추지 않았을 때였다.
배들은 닻을 내린 채 떨었고,
집들은 흔들리다 비명을 냈다.
사람들은 바람을 이길 힘이 없어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 노인이 조용히 말했다.
“바람에도 길이 있고,
머무는 자리도 있지.
이 바람이 어디에 쉴지,
내가 찾아보마.”
노인은 새벽녘에 홀로 바닷가로 걸어갔다.
바람은 그를 밀지 않고 오히려 따라오는 듯했고,
파도는 낮게군만 속삭였다.
그리고 노인은 바다와 맞붙은 큰 바위 앞에서 멈췄다.
두 손을 바위 위에 얹고는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말을 건네듯 말했다.
“여기에서 쉬다 가거라.
길을 잃은 바람이여.”
그 순간, 소란스럽던 바람이
사그라들듯 고요해졌다.
흔들리던 나뭇가지도 멈추고,
하얀 포말을 뿜던 파도도 잔잔해졌다.
그날 이후로
폭풍 같은 바람이 닿을 때마다
그 바위 근처에만큼은
바람이 머물다 조용히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바위를
‘바람을 묶은 바위’,
혹은 ‘매듭바위’라 부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섬을 관통하지 못하고
그 바위 앞에서 잠시 고요해졌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며
노인의 이름도 잊히고
매듭바위의 전설도 책 한 장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낭도 사람들은 지금도 이렇게 믿는다.
“바람은 길을 잃어도,
낭도는 길을 찾아준다.”
그리고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부는 날이면
누군가 매듭바위 위에 조용히 손을 얹고 말하곤 한다.
“여기에서 쉬다 가.
섬이 널 기억하고 있으니.”
낭도는 오늘도 고요 속에서
바람의 숨결을 묶으며
섬의 밤을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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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thing Special》: 《고요의 품, 낭도(狼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