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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1919년

— 잊힌 스크린의 시작을 기억하다.

by 이다연
“모든 영화에는 기원이 있다.
그리고 한국 영화의 기원은,
1919년 가을, 단성사의 어두운 스크린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영화는 이제 세계 무대에서 문화적 영향력을 가진 거대한 산업이자 예술 장르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 시작은 놀라울 만큼 소박하고, 동시에 놀라울 만큼 복합적인 역사적 층위를 지닌 지점에서 출발한다.




『의리적 구토』

- 이 이름은 단순히 ‘한국 최초의 영화’라는 수식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시대의 문화적 응답이며 예술적 선언이다.


이번 글에서는 이 유실된 영화를 둘러싼 역사, 산업, 미학, 그리고 문화적 기억의 층위를 따라가 보며, 잊힌 출발선 위에서 지금의 한국 영화를 다시 바라보는 비평적 사유의 여정을 제안한다.


『의리적 구토』에 대한 비평적 고찰

― 한국영화사의 시원(始原)으로서의 역사·미학적 의미


1. 들어가며

한국 영화는 현재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 영화사의 주요 흐름 속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연의 확장은 분명한 내적 기원을 전제로 할 때만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은 흔히 "한국 최초의 영화"로 지칭되는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 1919)』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 맥락, 미학적 특징, 그리고 문화사적 위상에 대해 비평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단순한 ‘최초’라는 수사 이상의 구조적,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초기라는 이중의 역사적 지층 속에서 발생한 혼성적 미디어 텍스트로 해석되어야 한다.


2. 시대적 배경과 영화적 조건

1) 식민지 조선의 문화정치학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조선은 일본 제국의 내지화 정책 아래 철저히 통제된 문화 공간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는 서구적 근대 문화—특히 영상 매체의 유입이 가속화된다. 활동사진은 단순한 오락의 수단을 넘어 새로운 시각질서의 탄생이자, ‘보는 자’로서 조선인의 위치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리적 구토』는 하나의 응답이었다. 식민 권력의 시선이 강요한 프레임 안에서, 조선인이 주체적으로 기획한 최초의 시각서사였던 것이다.


2) 단성사와 영화 제작의 산업적 조건

당시 서울 종로에 위치한 단성사는 연극과 활동사진을 겸한 복합 공연장이자, 한국 영화산업의 태동기적 현장이었다. 『의리적 구토』는 단성사 대표 박승필의 자본, 김도산의 연출, 그리고 윤백남의 각본 및 주연을 통해 제작되었으며, 일본인 촬영기사와 일본제 현상 기술의 도움을 받아 완성되었다.
이는 조선인이 주도한 최초의 상업영화 시도였으며, 식민지라는 특수 조건 하에서 영화라는 ‘혼종적 매체’가 생성되는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다.

3. 작품 해석: 내러티브와 미학의 측면

1 )복수 서사의 이식과 조선적 재해석

『의리적 구토』의 핵심 서사는 “복수”이다. 이는 일본 에도시대 무사극(구토모노, 仇討物)의 장르적 유산을 계승하고 있으나, 조선적 정서—곧 가족의 ‘의리’라는 윤리적 기제를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문화적 변형(adaptation)*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영화는 제국적 장르 코드를 조선화하는 작업이자, 서사적 주체의 전복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2 )무성영화와 ‘변사’의 존재

『의리적 구토』는 무성영화였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소리 없는 영상이 아니라, 당시의 영화 감상 방식—즉 *변사(辯士)*라는 내레이터의 존재를 전제로 한 복합 텍스트였다는 점이다.
변사는 영상과 관객 사이를 해석적으로 매개하며, 이야기의 감정과 의미를 관객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의리적 구토』의 영향은 영상 미학만이 아니라, ‘소리 없는 영화의 소리’라는, 한국적 영화 문화의 독자성에도 연결된다.


4. 유실된 영화, 그러나 지워지지 않은 텍스트

『의리적 구토』는 현재까지 실물 필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사적 서사 속에서 이 작품은 단지 실체가 유실된 영화가 아니라, 문화적 기입의 방식으로 살아남은 텍스트이다.
윤백남의 자필 기록, 당대 신문 기사, 관람 후기를 통해 우리는 이 작품의 존재와 영향력을 유추할 수 있으며, 이는 일종의 ‘사라진 영화의 아우라’로서 지속되고 있다.

이 영화의 부재는 오히려 우리에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필름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의리적 구토』는 한국 영화의 정신사적 기원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5. 결론: 최초성의 의미와 그 이후


『의리적 구토』는 단지 "한국 최초의 영화"라는 지시어를 넘어서, 한국영화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시론(詩論)이자 프레임이다.
이 작품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조선인이 주체적 시선으로 이미지를 구성한 최초의 시도였고, 이후 한국영화가 어떻게 식민-근대의 미학적 조건을 극복하고 독자적 정체성을 구축해 나갔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단서이다.

더불어, 이 영화는 한국영화가 늘 외부 문법과 내적 윤리를 병치해온, 혼종성과 재해석의 예술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의리적 구토』는 단지 과거의 유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현재적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종원, 『한국영화사』, 집문당, 1996.

한상언, 「『의리적 구토』와 한국영화의 기원」, 『영상문화연구』 제12호, 2010.

이영수, 『식민지 조선의 시각문화』, 문학과지성사, 2013.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 100년사 연표』, 2019.

『조선일보』, 1919년 10월 27일자 기사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 1919)』 상세 정리

1. 작품 개요

제목: 의리적 구토 (義理的仇討)

제작연도: 1919년

형식: 무성영화 (Silent Film), 흑백

장르: 멜로드라마, 복수극러닝타임: 약 40~50분 (추정)

상영 방식: 변사(辯士) 해설 동반

상영제작/배급: 단성사 (박승필)

촬영: 일본인 촬영기사 (실명 미상, 니혼사진기 사용)

현상 처리: 일본에서 필름 현상


2. 제작 및 연출

-감독: 김도산(金度山)

한국 영화사의 실질적 첫 감독으로 평가됨.

무대 연극 연출가 출신으로, ‘신극(新劇)’의 무대 연출 경험을 살려 연극적 내러티브를 영상으로 옮김.

『의리적 구토』를 통해 연극에서 영화로의 매체 전환 과정을 실험함.


-각본 및 주연: 윤백남(尹百南)

언론인이자 극작가, 문화계 지식인.

《매일신보》, 《조선일보》 등에서 활동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각본, 기획, 주연까지 담당하며 당시 조선인의 ‘문화 자주성’을 영화 매체로 표현한 대표 인물.

신파극적 요소를 차용하되, 조선적 정서(의리, 가족애 등)를 중심으로 재해석.


3. 주요 인물 및 배우 구성


『의리적 구토』는 윤백남이 각본과 주연을 겸한 작품으로, 그는 극 중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아들 역을 맡았다. 윤백남 외의 출연진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여주인공에 해당하는 인물(희생당한 가족 구성원 혹은 연인 역할로 추정됨)과 악역(아버지를 살해한 인물로 보임)에 대한 배우 이름은 모두 미상이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에 ‘전문 영화배우’라는 개념이 아직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며, 실질적으로 출연자 대부분은 신극(新劇) 무대에서 활동하던 연극배우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극과 영화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던 한국 영화 초기의 상황 속에서, 『의리적 구토』 역시 무대 중심 연기와 연극적 서사 구조를 그대로 영상 매체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배우 구성 역시 연극 중심의 캐스팅 문법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윤백남 외에는 정확한 배역 및 배우 정보가 전해지지 않으며, 관련 문헌과 기사에서도 출연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정보의 결핍은 필름의 유실과 더불어, 초기 한국영화사 복원의 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4. 줄거리 요약


『의리적 구토』는 신파극 형식의 복수극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은 서사 구조를 따른다:

비극적 사건: 주인공의 아버지가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음모에 의해 희생된다.

가문의 몰락: 가족은 해체되고, 주인공은 신분을 숨기거나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복수의 맹세: 성인이 된 주인공이 진실을 알게 되고, 가문의 원수를 찾아 복수를 다짐한다.

의리의 실현: 주인공은 정의와 의리의 이름으로 복수를 실현하거나, 비극적인 종말 속에서 가족의 명예를 지킨다.


※ 영화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의리(義理)”는 단순한 복수 이상의 윤리적 정당성, 가족 중심의 도덕 가치를 강조한다.


5. 영화사적 의의

+한국 최초의 극영화

조선인이 각본·연출·주연을 모두 맡은 첫 번째 상업영화.

영화 자체가 하나의 문화 민족주의적 실천이었음.


+신극과 영화의 결합

당시 조선에 퍼지던 ‘신극운동’의 연극 형식을 영상 언어로 전환.

무대 중심 연기, 정면구도, 정지된 카메라 등 연극적 미장센이 강함.


+변사 해설 구조

무성영화이기 때문에, 모든 상영에는 *변사(영화 해설자)*가 동반.

변사가 장면 설명, 대사 낭독, 감정 유도 등을 통해 관객과의 직접적 소통을 수행.

『의리적 구토』는 변사 중심 영화 감상의 첫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됨.


6. 상영 정보

개봉일: 1919년 10월 27일

상영관: 단성사 (서울 종로)

반응: 동시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상당한 관객 호응을 얻었으며, “활동사진이 조선인 스스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관객에게 큰 자부심을 안겼다는 평이 있다.


7. 자료 유실과 복원 시도

필름 상태: 전량 유실

복원 시도: 한국영상자료원 및 영화사학자들에 의해 복원/발굴 시도 있었으나, 영상자료는 미발견 상태다.

기록 문헌: 윤백남의 회고록, 신문기사(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단성사 상영자료만 일부 존재한다.


관련 문헌 및 참고자료

김종원, 『한국영화사』, 집문당, 1996

한상언, 「『의리적 구토』와 한국영화의 기원」, 『영상문화연구』 제12호, 2010

김영진, 『한국영화 100년사』, 한국영상자료원, 2019

『조선일보』 1919년 10월 27일자

한국영상자료원 아카이브 (film.koreafil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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