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자르는 칼, 이성의 시대를 찢다
1929년,
프랑스의 한 소극장에서 상영된 21분짜리 무성 영화 한 편이 관객을 경악하게 만든다.
첫 장면에서 면도칼로 여성의 눈알을 가르는 손이 등장한다. 관객은 눈을 감지 못한 채 스크린을 마주해야 한다. 줄거리도 없고 인물의 정체도 불분명하다. 이 영화는 심지어 관객이 ‘이해하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앙달루시아의 개〉. 루이스 부뉴엘과 살바도르 달리, 두 초현실주의자가 손잡고 만든 이 영화는,
영화가 ‘서사’라는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증명해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영화는 이제 '정신'과 '무의식'을 훨씬 깊숙이 들여다보는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선포했다.
제목: 《앙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
감독: 루이스 부뉴엘
각본: 루이스 부뉴엘 & 살바도르 달리
제작년도: 1929
형식: 무성영화, 흑백, 21분
시청 링크: https://en.wikipedia.org/wiki/File:Un_Chien_Andalou_(1929).webm
스페인 출신 영화감독, 초현실주의 영화의 선구자. 가톨릭적 배경에서 성장했지만 이후 무신론과 반권위주의로 전향하며 예술로 종교와 사회 질서를 비판했다.
《앙달루시아의 개》로 영화계에 충격을 안기며, 《절멸의 천사》《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등 통해 부르주아 사회의 위선과 이중성을 신랄하게 풍자. “영화는 무의식을 자극하는 칼이어야 한다.” 라는 철학을 가졌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조각가, 영화인. 기괴하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무의식·꿈·죽음·성적 상징을 독창적으로 표현했다. 대표작은 회화 《기억의 지속》(녹아내리는 시계) 등. 《앙달루시아의 개》 공동 각본에 참여, 꿈에서 본 이미지를 바탕으로 영화의 전개를 구성했다. 극단적인 자아 연출과 기행으로 유명했으며,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문 인물이기도 하다.
둘은 젊은 시절 친구이자 동지였으며, 《앙달루시아의 개》를 통해 영화와 미술, 무의식과 현실을 뒤섞는 전례 없는 실험을 함께 수행했다.
1920년대 영화, 상식을 해체하다 – 루이스 부뉴엘과 살바도르 달리의 충격 실험
1929년 파리, 조용한 소극장. 관객은 불 꺼진 스크린 앞에 앉아 낯선 무성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음악이 흐르고, 화면 위에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는 면도칼을 들고 있다. 다음 장면, 구름이 하늘을 가르고… 여성의 눈이 클로즈업된다. 그리고 면도칼이 그 눈알을 정확히, 무심하게 찢는다.
관객들은 비명을 질렀다. 일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일부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20여 분을 버텼다. 영화는 어떤 설명도 없이 기이한 장면들을 나열하며 끝이 났다.
그날 상영된 영화의 제목은 《앙달루시아의 개 (Un Chien Andalou)》. 감독은 루이스 부뉴엘, 공동 각본은 살바도르 달리. 그리고 그들은 선언했다.
“이 영화에는 어떤 논리적 설명도,
상징도, 줄거리도 없다.”
기존의 모든 영화 언어에 대한 정면 도발이었다.
《앙달루시아의 개》는 영화사 최초의 초현실주의 영화로 분류된다.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 이성의 무력함을 절감한 젊은 예술가들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이들은 전통적 가치, 합리주의, 기독교 도덕, 자본주의 질서까지 모두 부정했다. 대신 꿈, 무의식, 욕망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부뉴엘과 달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 영화를 구상할 당시, 서로 꿈에서 본 장면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만들기로 약속한다. 달리는 “손에서 기어 나오는 개미”를, 부뉴엘은 “구름이 하늘을 가르고, 면도칼이 눈을 자르는 장면”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 가지 규칙을 정했다.
“우리를 자극하는 장면만 넣을 것.
어떤 논리나 의미도 설명하지 말 것.”
이 영화는 줄거리가 없다. 등장인물도 이름이 없고 시간 순서도 없다. ‘옷을 갈아입는 남자’가 ‘길 위의 여자’를 쫓아가고, 손에서 개미가 기어 나오고, 성직자 차림의 남자들이 죽은 소가 묶인 피아노를 끌며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해변에 묻힌 남녀의 시체.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꿈이다. 비논리적이고 단절적이며, 의식과 무의식이 뒤섞인 상태. 시나리오 자체가 프로이트의 꿈 해석에 가까운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앙달루시아의 개》는 ‘상징’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눈을 자르는 칼”은 단순히 충격적일 뿐 아니라, 기존 시각(=현실 인식 방식)에 대한 해체 선언처럼 읽힌다.
“너희가 보던 세계는 진짜가 아니다.
우리는 너희 눈을 찢고, 그 안의 진짜를 보여주겠다.”
“손에서 기어 나오는 개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살바도르 달리는 죽음, 부패, 성적 억압을 상징할 때 곤충을 자주 사용했다.
“피아노에 시체를 묶고 끌고 가는 성직자들”
은 무엇인가?
기독교 윤리와 예술, 전통과 죽음의 상징이 하나로 뒤엉켜있다.
이처럼, 영화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충돌을 통해 관객의 이성을 흔든다.
몽타주 편집도 전통적 내러티브를 거부한다. 장면과 장면의 연결은 인과가 아니라 연상이다.
이는 전함 포템킨의 소비에트 몽타주가 이데올로기적 명료함을 추구했다면,《앙달루시아의 개》는 무의식적 충돌과 감각의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방향이다.
불편함이 예술이 되는 순간,
관객은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할까?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오히려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 영화의 세계에선 어긋난다.
부뉴엘은 말한다.
“나는 관객이 당혹스럽기를 바란다. 기존의 가치관을 무력하게 느끼기를 바란다.”
초현실주의 예술은 늘 불편함을 동반한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든, 성적 윤리이든, 정치적 확신이든 간에, 모든 ‘확고함’을 흔들기 때문이다.
《앙달루시아의 개》는 바로 그 불편함을 통해 새로운 감각의 통로를 열고자 한 실험이다. 오늘날 예술영화, 실험영화, 뮤직비디오, 광고영상 등에서 흔히 쓰이는 ‘의미 없는 이미지 연쇄’는 대부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0년대는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한 시대였다.
《전함 포템킨》은 혁명의 이데올로기를 영화적 몽타주로 시각화한 작품이었다. 계단 위의 유모차 장면은 정치적 메시지를 관객의 감정에 각인시키는 힘을 지녔다. 반면, 《앙달루시아의 개》는 ‘무엇을 말하려는가’를 애초에 거부한다. 이성도, 도덕도, 줄거리도, 논리도 없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영화의 언어”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서로 닿아 있다. 하나는 집단의 감정(혁명)을 설계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무의식(욕망)을 폭발시켰다. 전함 포템킨은 혁명적 정치성, 앙달루시아의 개는 혁명적 미학성.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모두 영화의 경계를 넓힌 사건이었다.
《앙달루시아의 개》는 단 한 번이라도 본 사람에게는 잊히지 않는 영화다. 그 이유는 단순히 자극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평소엔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들’을 스크린 위에 던져놓기 때문이다.
영화가 항상 감동적이거나, 교훈적이거나, 이야기 중심적일 필요는 없다. 때때로 영화는 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익숙한 시각을 찢어내는 칼. 그 안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계가 열릴 수 있다.
루이스 부뉴엘은 철저히 가톨릭적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스페인 나바라 지방의 엄격한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고,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초현실주의와 무신론, 반권위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강한 반가톨릭 정서를 갖게 된다. 그의 자서전에서도 종종 종교를 혐오하고 두려워했으며, 그 감정을 창작으로 해소하려 했다고 밝힌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내가 그를 부술 수 있기 때문이다.” — 루이스 부뉴엘
《앙달루시아의 개》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무의식 속에 내재된 종교적 금기와 도덕을 해체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중반부, 등장인물이 “피아노에 죽은 당나귀 시체”와 “성직자 복장을 한 인물 둘”을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성직자(=기독교의 도덕과 권위)*가 죽은 짐승과 한데 묶여 끌려가는 모욕적인 이미지로 표현된다.
종교는 죽은 전통, 부패한 윤리, 욕망을 억압하는 권위 체계로 그려진다.
개미는 죽음과 부패의 상징이다. 개미가 손에서 기어 나오는 장면은 죄와 타락, 신체의 오염을 떠올리게 하며, 이는 종교가 금기시해 온 육체성의 표출로 해석된다.
즉, 신성한 육신을 파괴하는 원초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미지로 읽을 수 있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성적 충동과 죽음을 병치한다. 예컨대, 여성의 겨드랑이를 더듬던 남성이 죽은 채로 해변에 묻히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것은 가톨릭적 금욕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욕망, 육체적 충동에 대한 종교적 억압의 해방을 암시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절대 윤리, 죄와 구원, 이성적 계시의 언어를 억압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들은 예술이 더 이상 ‘천상의 의미’를 탐구하는 도구가 아닌, 무의식과 욕망의 해방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앙달루시아의 개》는 그 관점에서 하나의 반(反) 종교적 성서다.
신의 질서 → 무의식의 혼돈
도덕의 기둥 → 충동의 해방
교회의 권위 → 예술의 반역
이 영화는 종교적 상징을 직접적으로 파괴하거나 희화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상징체계의 근간을 무력화한다. 즉, 기독교적 ‘구원 서사’를 비의미와 무질서의 서사로 치환함으로써 그 권위를 해체한다.
영화의 해석은 언제나 관객에게 열려 있지만, 부뉴엘의 전작들과 비교해 볼 때 《앙달루시아의 개》는 ‘종교적 죄의식’에 대한 공격적 투사로 볼 수 있다.
종교는 우리 안에 ‘욕망을 금지하고 억압하는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그 금기를 무너뜨려, 욕망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그 무너짐의 순간들을 나열한다. 불쾌하지만 시선을 뗄 수 없는 이유다.
결론: 신을 찌르려는 칼, 눈을 자르는 영화
《앙달루시아의 개》는 말 그대로 시각(시선)의 해체이자, 믿음(믿음의 체계)의 해체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강조한 도덕, 구원, 질서, 금욕은 이 영화에서 파편화되고, 욕망과 무의식, 죽음과 불쾌로 대체된다.
만약, 우리가 이 영화를 종교적 상징체계의 해체극으로 받아들인다면, 《앙달루시아의 개》는 하나의 반성경적 선언문이자, 무신론자의 ‘기도’ 일지도 모른다. 이성으로는 결코 해석되지 않는 무신의 미학.
그러나 바로 그 해석 불가능성이야말로 《앙달루시아의 개》가 남긴 가장 혁명적인 유산일지도 모른다. 서사와 도덕, 윤리와 종교라는 오랜 프레임 속에 길들여진 인간에게,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제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치적, 미학적 저항이다.
이 영화는 어떤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스크린 앞의 ‘나’라는 존재가 가진 이성, 기억, 억압, 무의식의 구조를 해부하도록 자극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단지 한 편의 실험 영화가 아닌, 자신을 거울삼아 관객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블랙박스가 된다.
우리는 그 앞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가?
정돈된 내면이 아니라, 찢긴 감각과 꿈, 눌려있던 욕망들, 불편한 진실의 파편일 것이다.
《앙달루시아의 개》는 분명 혁신적이다. 그러나 모든 실험이 무조건적으로 찬사 받을 수는 없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의도적인 난해함과 자극적인 이미지의 나열이라 비판했다. "의미를 거부한다"는 선언이 오히려 해석을 거부하는 독단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시청자에게 정서적 고통이나 혐오감을 유발하면서도, 그 책임은 “이건 초현실주의니까”라는 말로 회피하는 점도 지적된다.
“불편함을 일으키는 것”과 “불쾌감을 유희화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영역이며, 《앙달루시아의 개》는 그 경계에서 종종 위태롭다. 특히 종교적 상징 해체나 성적 이미지의 반복은, 오늘날의 시선에서 볼 때 충동적 반항 이상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할 위험도 있다. ‘꿈의 언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상징이 해체될 때, 관객은 결국 해석할 수 없는 고립 속에 남겨지기도 한다.
《앙달루시아의 개》는 질문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 질문은 화면 속이 아니라, 관객의 눈 속에 존재한다. 이 영화는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당신의 ‘눈’을 찢고, 그 안에 숨겨진 감각과 믿음을 흔든다.
만약 종교란 해답을 믿는 행위라면, 이 영화는 믿음 이전의 혼돈, 기도 이전의 침묵, 그리고 신이 아닌 인간 내면에 도사린 불안과 욕망을 보여주는 무신론적 묵상이다.
그러니, 《앙달루시아의 개》는 눈을 자르지만, 결코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칼로 쓴 하나의 시(詩)*다. 세상을 다시 보게 하기 위해, 한 번쯤 눈을 감고 들어야 하는—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불쾌할 만큼 진실한, 영혼의 상처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