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좀비딸>을 보고
여름방학 시즌에 개봉한 <좀비딸>. 영화를 특별히 챙겨보는 편이 아니라서, 그냥 흘깃 보고는 넘겼는데 이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인스타에서 이런 코멘트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초반부, 강렬한 좀비의 등장에서 느껴지는 기괴함이 지나가면 그때부터는 부드럽고 따스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좀비로 변해버린 딸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든 이 사회에서 티 나지 않게 키워보려고 하는 아빠의 노력이 코믹 요소와 함께 조화롭게 섞인다.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력은 영화의 몰입도를 높여주고, 초반에 좀 튀나? 싶었던 딸의 역할도 인간화에 조금씩 다가가는 좀비의 연기에 최적화된 듯하다.
당연히 울 수밖에 없겠다 예상은 하고 갔으나 눈물 함정이 수두룩했다. 일단 보통 사람들은 보며 웃어넘겼을, 아빠가 좀비딸을 교육하는 부분부터 쉽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보며 그동안 유림이에게 시도했던 수많은 종류의 치료법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의 제일은 행동중재요법인 ABA) 마치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가르쳐놓으면 사라지고 익숙해진 것 같으면 어느새 퇴행하던 유림이의 모습. 그래도 저 딸은 한 계절이 다 지나가기 전에 저만큼이라도 진전이 있구나. 유림이는 12년째 제자리 걸음인데. 나는 저 아빠처럼 매 순간 진심으로 유림이를 가르치려고 했나? 하지만 내가 처한 상황에 감정적으로 빠져서 아등바등하다가 겨우 나 하나만 건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조정석이 딸의 옷을 가지러 서울의 집에 들렀다가, 잠깐 딸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 환상을 보게 되는 씬에서는 꿈속의 유림이가 떠올랐다. 정상 발달 아이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유림이를 보다가 잠에서 깨고 나서 허하던 그 마음.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꿈에서는 왜 그게 그렇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지. 깨고 나면 허무함 속에서 아직도 이런 희망을 버리지 못한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을 몇 번을 했는지. 하지만 부모라면 결국 버리지 못하는 그 실낱같은 희망. 만약에 유림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저 장면의 딸처럼 말해줄까? “엄마, 아빠. 사실 나도 말하고 싶어요. 나도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전달하고 싶어요. 근데 그게 너무 어려워요. 그래도 나를 기다려 줄 수 있어요?” 하고.
영화의 막바지에서 딸이 잡혀갈 위기에 처하자 아빠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떨치고 단 둘이 무인도로 가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닿게 될 곳은 결국 무인도와 같은 고립뿐이구나. 누가 입 밖에 꺼내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스스로 깨닫게 되는 외로움과 고립에 파묻히는 그런 결말. 어쨌든 딸은 마지막에 “아빠”라고 불러줬지만, 남편은 평생 유림이에게 “아빠”라는 말을 듣지 못하겠지. 나도 유림이에게 엄마라고 불릴 일은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부모와 자식 간의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감동에 젖어서 웃으며 영화관을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앞에서 전혀 울지 않는 남편의 눈에 맺힌, 슬픔과 서러움이 응축된 짜디 짠 눈물방울 대신.
+) 가끔 린아가 “엄마, 저는 귀신이 너무 무서워요.”라고 할 때 “린아야, 엄마는 귀신이 하나도 무섭지 않아. 귀신이 엄마한테 뭘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엄마는 귀신보다 자폐가 훨씬 무서워.”라고 농담처럼 대꾸하곤 했는데, 이제 바꿔야겠다.
좀비보다 무서운 자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