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부에가 발견하고 단테가 세공한 르네상스의 초석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는 르네상스 회화의 서막을 연 인물로, 서양 미술사의 대전환점에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세 말기로, 신 중심의 위계적이고 상징적인 회화가 여전히 미술의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다. 그런 흐름 속에서 지오토는 전통적인 회화 양식을 거부하고, 인간의 감정과 현실 공간을 화폭에 담아내는 새로운 화풍을 시도했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 중심의 사고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시각적 선언이었다.


그러나 지오토의 등장은 예기치 않은 천재의 탄생이라기보다, 동시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형성된 결과였다. 그는 스승 치마부에(Cimabue)에게 발굴되었고, 시인 단테(Dante Alighieri)에 의해 예술사에 기록되었다. 이들 세 사람의 연결은 마치 조각가, 원석, 명판을 쥔 장인처럼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세 개의 손이었다. 본 장에서는 지오토가 어떠한 인물이었고, 치마부에와 단테가 그의 삶과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Giotto di Bondone (출처 : Diari Toscani)




1. 르네상스의 문을 연 자, 지오토 디 본도네


지오토 디 본도네는 르네상스 회화의 서막을 연 인물로,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개척자였다. 그가 활동한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는 중세 후기로, 여전히 회화는 신성한 존재를 숭배하고 상징을 반복하는 도상 중심의 세계였다. 성모 마리아는 항상 같은 모습으로, 예수는 동일한 자세로, 배경은 황금빛 평면으로 구성되었다. 미술은 신학의 도구였고, 작가는 개인적 창작자라기보다는 익명의 장인이었다.


하지만 지오토는 이러한 질서에 근본적인 균열을 가했다. 그는 천상의 형상보다 지상의 감정에 주목했고, 금박의 평면보다 공간의 깊이를 그렸다. 그의 회화에는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발생하며, 감정이 흐른다. 즉, 단순한 이미지의 나열이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이로써 그는 르네상스 회화의 언어를 창조한 초석이 되었고, 이후 15세기 피렌체 회화의 전통은 그의 이름을 기점으로 분기하게 된다.


지오토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적지만, 일반적으로 1267년경 피렌체 인근 끌레 디 베스피자노(Clò di Vespignano)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 양을 돌보며 자연을 관찰했고, 바위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의 천재성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치마부에(Cimabue)였다. 치마부에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전통적인 기법과 함께 벽화 제작의 실무적 기반을 전수했다. 그러나 지오토는 단지 스승의 기술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감정과 서사적 구성을 그림 속에 녹여내는 자신만의 회화 언어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지오토의 대표작은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1305년경) 벽화 연작이다. 이 예배당의 내부는 전면 프레스코로 채워져 있으며,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생애를 다룬 38개의 장면이 좌우 벽면을 따라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이 장면들에서는 단지 종교적 사건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서가 중심에 자리한다.

cappella-degli-scrovegni-gli-affreschi-di-giotto.jpg 스크로베니 예배당 (출처 : Padova Musei Civici)


특히 [애도] 장면에서 보이는 비탄의 감정은 당시의 회화사상 유례없는 표현이었다. 마리아는 죽은 아들을 안고 오열하고, 제자들과 천사들 역시 눈물을 흘리며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 감정이 공간을 지배하는 구성, 그리고 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제스처는 중세 미술의 경직된 상징성을 탈피한 지오토의 혁신적 지점을 잘 보여준다.

giotto-di-bondone-the-mourning-of-christ-1306-trivium-art-history.jpg 지오토 디 본도네, 애도, 1305, 스크로베니 예배당


이와 함께 [성 안나와 성 요아킴의 만남] 장면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장면은 예루살렘의 황금문 앞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재회한 두 인물이 서로를 껴안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들의 눈빛과 몸짓, 부드럽게 흐르는 옷자락과 건축적 배경의 구성은 지오토의 공간 감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장면은 단순히 성스러운 서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적인 감정의 교류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장면이었다.

Giotto_di_Bondone_-_No._6_Scenes_from_the_Life_of_Joachim_-_6._Meeting_at_the_Golden_Gate_-_WGA09176.jpg 지오토 디 본도네, 성 안나와 성 요아킴의 만남, 1305, 스크로베니 예배당


이탈리아 아씨씨의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상부 성당에 그린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 연작 역시 지오토의 서사적 감각과 사실주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업이다. 이 연작은 성인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주요 장면을 묘사하며, 특히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 '가난한 자에게 외투를 벗어주는 성 프란체스코', '재물을 포기하는 성 프란체스코' 등의 장면은 상징성과 인간성이 절묘하게 조화된 장면으로 평가받는다. 프란체스코는 더 이상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 공동체와 정서 속에 살아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씨씨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출처 : Haltadefinizi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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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체스코 / 가난한 자에게 외투를 벗어주는 성 프란체스코 / 재물을 포기하는 성 프란체스코


한 편, 지오토는 조각적 양감을 회화에 도입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의 인물 묘사는 평면 위에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입체 조각처럼 보인다. 볼륨감 있는 인체 표현, 명암을 통한 형태 강조, 인물 간 거리 조절을 통한 공간 표현은 이후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거장들의 조형 감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건축가로도 활동했다.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Giotto's Bell Tower)은 그가 설계한 것으로, 색감의 조화와 입면의 분할 방식, 수직성과 안정성의 균형에서 그의 미감이 드러난다. 그는 단지 회화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이해와 구성 능력도 뛰어났으며, 이는 회화적 공간 구성과 일맥상통하는 역량이었다.

31e6004ecae13b0cc1a0376ff639c6bb_campanile (3).jpg Giotto's Bell Tower (출처 : Opera di Santa Maria del Fiore)


그의 영향력은 동시대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마사초는 지오토의 감정 표현과 공간 구성을 계승했고, 브루넬레스키는 그의 건축적 사고를 발전시켰다.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은 지오토를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칭했으며, 19세기 라파엘 전파 형제단은 그를 회화의 원점으로 되돌아간 인물로 추앙했다.

67e353cf9ce2c.jpg 바사리의 이탈리아 예술가 이야기 (출처 : 앨리스의 책장)


지오토는 단순히 기법의 혁신을 이룬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인간 중심의 세계를 그림으로써 예술의 목적과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꾼 인물이었다. 그의 그림은 더 이상 신비의 상징이 아니라, 현실의 드라마였고, 기적이 아닌 감정으로 관객과 소통했다. 르네상스는 이렇게, 한 사람의 붓끝에서 조용히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출발의 첫 걸음을 가능하게 만든 이는 누구였을까? 지오토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그의 재능에 불을 붙인 이는 바로 스승 치마부에였다.


99abbda5ddb7f267fc9cfa6fc850a2a2.jpg Giovanni Cimabue (출처 : Europeana)


2. 천재를 알아 본 천재의 눈, 치마부에


지오토의 천재성을 처음으로 알아본 이는 바로 치마부에였다. 치마부에(Cimabue, 1240–1302)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행하던 시기의 전환점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잔틴 양식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그 내부에서 미묘한 불균형을 감지하고 새로운 회화 언어를 탐색한 화가였다. 피렌체에서 태어나 활동했던 그는 시대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중대한 과도기에 서 있었다. 회화의 목적이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던 시대에 그는 표현의 자유와 인간 중심의 시선을 실험하며 다음 세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치마부에는 전통적인 도상학과 상징 체계를 익히는 데 탁월했고, 실제로 그의 작품 중 상당수는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의 제단화였다. 하지만 그가 회화에 담은 요소들은 단순히 형식적이지 않았다. 인물의 얼굴에 미묘한 감정이 스며 있고, 구도의 긴장 속에 이야기를 암시하는 구성력이 존재했다. 이런 변화는 당시 대중과 교회로부터 단번에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훗날 르네상스를 연 화가들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남겼다.


지오토와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 일종의 역사적 직관이었다. 양치기 소년, 지오토가 돌에 그린 양의 그림을 보고 감탄한 치마부에는 그를 곧장 제자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공방에서 훈련시켰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후대의 전승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치마부에가 기존의 틀 안에서 새로운 재능을 알아보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그림을 가르친 스승이 아니라, 지오토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운 방향 설정자였다.


치마부에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리스도의 채찍질(The Flagellation of Christ)]은 고문당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장면을 통해 전통적인 주제 안에 새로운 시각 질서를 도입한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는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가 위치하고, 양옆에는 그를 채찍질하는 병사들이 균형 있게 배치되어 있다.

지오바니 치마부에 , 그리스도의 채찍질 , 1280, 뉴욕 프릭 콜렉션

그리스도의 육체는 신성하면서도 인간적인 연약함이 드러나고, 병사들의 동작은 역동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다. 특히 바닥의 평행선과 건축적 배경은 공간의 깊이를 암시하며, 이후 지오토가 발전시킬 회화적 공간 구성의 기반이 된다. 이 작품은 치마부에가 비잔틴 전통을 따르면서도 조형적 감각과 감정 표현의 확장을 실험했던 시기의 중요한 결과물로 평가된다.


치마부에의 대표작, [산타 트리니타의 성모(Santa Trinita Maestà)]는 현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원래 피렌체의 산타 트리니타 교회의 제단화를 위해 제작되었다. 중앙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어좌에 앉아 있고, 양옆에는 여섯 명의 천사, 하단에는 네 성인이 경배하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Cimabue_Trinita_Madonna.jpg 지오바니 치마부에 , 산타 트리니타의 성모 , 1288-1292,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작품은 금박 배경, 대칭적 구도, 정면 응시 등 비잔틴 전통을 따르면서도, 그 안에서 치마부에만의 조형적 실험이 돋보인다. 성모의 얼굴에는 보다 부드럽고 인간적인 표정이 깃들고, 옷 주름은 입체감과 빛의 방향을 암시하며 현실감을 부여한다. 천사들 역시 단조롭게 복제된 형상이 아니라, 각기 다른 자세와 시선으로 배치되어 장면에 생동감을 더한다.


특히 어좌와 성인들의 크기 조절, 구성의 깊이는 본격적인 원근법 이전 단계의 공간 구성 실험으로 평가된다. [산타 트리니타의 성모]는 전통을 해체하기보다, 그 문법을 재구성하고 확장하려는 치마부에의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르네상스 회화의 문을 여는 조용한 시작점이었다.


또 다른 대표작은 아레초 산 도메니코 대성당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Crucifix)]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전보다 더욱 유기적인 형태를 띠며, 고통에 뒤틀린 근육과 떨어진 머리, 처진 어깨 등을 통해 죽음의 육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장면은 신성을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의 현실을 그려내는 치마부에의 새로운 시선을 보여준다. 이런 회화적 접근은 지오토가 본격적으로 현실의 감정을 담은 회화를 그리는 데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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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초 산 도메니코 대성당 (출처 : Discover Arezzo)


치마부에는 전통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 전통을 안에서부터 확장하려 했다. 지오토가 큰 도약을 가능케 했던 배경에는, 그러한 실험과 누적의 과정이 있었다. 치마부에는 중세적 질서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 틀 안에서 변화를 유도하려는 예술가였다. 그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향하는 교차로에서 가장 명민한 시선을 가졌던 인물이며, 지오토의 삶과 예술이 발화될 수 있도록 토양을 제공한 존재였다.


예술사에서 위대한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그 뛰어넘음은 스승의 어깨 없이는 불가능하다. 치마부에는 지오토라는 불꽃이 피어나도록 자신을 등불로 태운 인물이었다. 그는 단지 한 화가를 길러낸 것이 아니라, 다음 시대의 언어를 품고 있던 세대의 감각을 포착한 인물이었다.




3. 단테, 예술가의 이름을 역사에 새기다


치마부에가 지오토를 길러냈다면, 단테는 그 이름을 문학 속에 남겨 후대에까지 전했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는 피렌체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중세 유럽 문학의 정점에 선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시인이 아니었다. 문학자이자 철학자, 정치인이었던 단테는 시대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는 사상가였다. 그의 대표작 [신곡(Divina Commedia)]은 그저 종교적 상상력을 담은 서사시가 아니다. 그것은 중세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인식의 전환, 인간의 내면과 구조를 탐사하는 거대한 사유의 기록이었다.


Dante_Domenico_di_Michelino.jpg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 신곡 사본을 든 단테, 1465,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상태를 상징한다. 이 여행을 통해 단테는 죄와 구원, 신과 인간, 역사와 사상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아우른다. 그는 고대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길잡이로 삼아 지옥과 연옥을 거치고, 천국에서는 이상적인 여성 베아트리체를 따라 신의 현현에 도달한다. 이 전체 여정은 종교적 메시지를 넘어서 인간의 내면과 감정, 지성의 구조를 파헤치는 문학적 실험이자 철학적 드라마였다.


Sandro_Botticelli_-_La_Carte_de_l'Enfer.jpg 산드로 보티첼리, 단테 신곡의 지옥 지도, 1490년대, 바티칸 도서관


이 웅대한 이야기 속에 단테는 동시대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천국과 지옥에 위치되며 단테의 윤리적 판단과 역사 인식의 대상이 된다. 이 중, 단테가 [신곡] 연옥편 제11곡에서 언급한 인물이 바로 지오토다. 그는 이렇게 쓴다. “치마부에가 한때 화가의 명성을 얻었으나, 이제는 지오토가 그 빛을 빼앗았도다.” 이 문장은 회화사의 전환을 선언하는 가장 짧고 강력한 선언이었다. 단테는 미술의 언어가 상징에서 사실로,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정확히 감지했다.


이 언급이 중요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첫째, 단테는 회화사를 문학의 한가운데에 끌어들였다. 중세까지 회화는 신학적 도구였으며, 그 작가의 이름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단테는 지오토를 실명으로 기록함으로써, 예술가 개인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웠다. 이는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들의 자의식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같은 후대의 작가들은 단테의 이 언급을 통해 지오토의 위상을 인식했고, 스스로를 창조자로 자각하게 되었다.


둘째, 단테는 문학 언어의 혁신자이기도 했다. [신곡]은 당시 교양의 언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토스카나 방언 기반의 이탈리아어로 쓰였다. 이는 지오토가 황금배경의 전통을 버리고 현실의 공간과 감정을 그려낸 것과 궤를 같이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장르에서 동일한 문화적 전환을 감행한 동시대의 혁신자였다.


셋째, 단테의 글쓰기에는 회화적 상상력이 풍부하다. [신곡]의 장면들은 마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드라마처럼 시각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옥의 고통, 연옥의 갈망, 천국의 광휘는 단테의 언어를 통해 생생히 펼쳐진다. 이는 단순히 단어의 힘을 넘어서, 회화적 구성을 문학적 장치로 끌어들인 방식이었으며, 단테가 지오토의 시각 언어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단테의 시는 화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화가의 시선은 시인의 문장을 새롭게 해석하게 만들었다. 이 두 예술 장르의 교차는 이후 르네상스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미켈란젤로는 시를 썼고, 레오나르도는 철학을 탐구했다. 예술은 더 이상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도구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지오토가 회화에서 인간의 감정을 드러냈다면, 단테는 문학에서 인간의 양심을 발굴했다. 지오토가 성모의 눈물을 그렸다면, 단테는 죄인의 고통을 노래했다. 그들은 시대의 전환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중심에 놓았고, 그 인간을 이해하려는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단테는 결국 자신의 문장을 통해 지오토라는 예술가에게 시간 너머의 생명력을 부여했다. 지오토의 그림이 벽에 남아 있다면, 단테의 언급은 그의 이름을 영원히 남겼다. 르네상스는 이렇게, 회화와 문학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Bargello_-_Kapelle_Fresko_2-1024x811.jpg 지오토 디 본도네, 단테 프레스코화, 1330년대 추정, 피렌체 바르젤로 박물관




4. 함께 빚은 르네상스의 씨앗


예술가의 이름이 역사에 남기까지, 그것은 결코 홀로 쓴 문장이 아니다. 지오토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그의 붓은 분명 독창적이었지만, 그 붓이 캔버스를 만날 수 있도록 이끈 손은 따로 있었고, 그 붓끝이 만든 흔적을 언어로 남겨준 이는 또 다른 손이었다. 치마부에와 단테, 이 두 인물은 지오토를 중심으로 각각 전통과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였다.


치마부에는 지오토를 발견하고 그에게 회화의 기초를 가르쳤으며, 나아가 새로운 감각의 가능성을 품은 그의 재능을 지지했다. 그는 스승으로서만이 아니라, 중세 회화의 마지막 수호자이자 르네상스의 첫 문턱을 연 안내자였다. 치마부에는 전통 안에서 미래의 씨앗을 보았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 ‘시선’은 그 자체로 위대한 창작 행위였다. 뛰어난 예술가가 되는 것만큼이나, 뛰어난 예술가를 알아보는 것 역시 당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단테는 지오토의 예술을 문학으로 새기고, 그의 이름을 문화사에 각인시켰다. 단테의 언어는 단지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인증이었다. 그는 예술의 변화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시대정신의 전환임을 감지했고, 그 통찰을 [신곡] 속 한 구절로 응축해 남겼다. 단테의 문장은 시간이 지나도 휘발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대를 거치며 더 깊게 각인되었고, 지오토의 이름은 그 문장을 타고 시간의 물결 위에 안착했다.


예술이란 단지 눈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읽고, 느끼고,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완성된다. 지오토의 경우, 그 기억의 구조물에는 치마부에의 눈과 단테의 문장이 핵심 기둥이 되었다. 예술은 보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 다시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속된다. 그렇기에 예술사는 창작자의 이름과 함께, 그를 믿고 지지한 이들의 이름도 아로새겨야 한다.


피렌체는 이 세 인물이 한 도시에 모여 있었던, 매우 드문 역사적 순간을 품고 있었다. 이는 단지 지리적 우연이 아니라, 그 도시에 축적된 감성, 사고, 제도, 교육, 종교, 예술의 밀도와도 관련이 있다. 피렌체는 중세 말기부터 새로운 인간상을 갈망하고 있었고, 예술은 그 욕망의 가장 정직한 언어였다. 세 인물은 그 흐름의 응결점이자, 도약을 위한 첫 파문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했지만, 결국 같은 물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르네상스는 어느 날 갑자기 피어난 꽃이 아니었다. 그것은 씨앗을 심은 이, 물을 준 이, 햇빛이 되어준 이, 바람을 막아준 이가 모두 있었기에 가능했다. 치마부에의 붓질은 단순히 색을 입히는 행위가 아니었고, 지오토의 손은 단순히 장면을 재현하는 기술이 아니었으며, 단테의 문장은 단순한 미문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는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 이전에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바꾸었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예술의 전환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관점의 전환이다. 치마부에는 단지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문을 열었다. 지오토는 그 문을 지나, 새로운 공간을 구축했다. 단테는 그 공간을 지도처럼 펼쳐 후대에게 전했다. 이 삼중주야말로 르네상스를 연 서곡이었다.


지오토는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는 치마부에 없이는 시작할 수 없었고, 단테 없이는 기억될 수 없었다. 예술가는 언제나 개인이지만, 그 이름이 사회적 기억으로 남으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타인의 시선과 말, 문장이 필요하다. 이 장에서 살펴본 세 인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로의 예술을 조형했고, 그 결과로 르네상스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지오토가 시작한 시각 혁명의 씨앗은 100여 년 후, 또 한 명의 젊은 화가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짧은 생애 속에서 회화의 공간을 완전히 다시 구성했고, ‘보는 법’ 자체를 바꾸었다. 선 하나로 깊이를 만들고, 구조 안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 화가는 르네상스 회화의 본격적 문을 연 인물로 기억된다. 그의 이름은 마사초(Masaccio). 이제 우리는 그가 어떻게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눈을 통해 세상을 그렸는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masaccio-nicolas-de-larmessin-and-esme-de-boulonais-1682-qemxmtjns1qi0euv3rz3m8y2oiftwqf5zqkpetbk74.jpg 마사초 (출처 : IL CENACOLO Italian Cultural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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