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나를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청소년기 내내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교실에 앉아 있으면 숨이 막혔다.
세상은 너무 넓고, 가만히 앉아 문제를 푸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부딪히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책상보다는 길거리에서, 교과서보다는 인파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모두가 내 방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내가 왜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엇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를 자책했고, 이유 없는 분노와 답답함 속에 허우적거렸다.
그때는 그 원인을 몰랐다.
형은 나와 달랐다.
중학교 때까지 항상 전교 1등, 과학고등학교를 거쳐 카이스트에 조기입학해 조기졸업, 석사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뒤로하고 27살에 군대에 다녀온 뒤 9개월 만에 의전원에 합격해 지금은 산부인과 전문의로 살아간다.
시험기간, 밤마다 방 안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있던 형은 늘 같은 자세로 문제를 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보며, 감탄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너무 반듯한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더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부모님은 평생 교사셨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형은 그 틀을 발판 삼아 더 높이 올라갔고 나는 그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결국 나도 대학에 갔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진짜 원하는 목표나 꿈이 있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성적에 맞는 학교와 과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방황은 계속됐다.
수업은 재미없었고, 미래를 그릴 수 없었다.
결국 바로 휴학계를 내고 군대로 향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멈춤 버튼을 누른 순간이었다.
군대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두 번의 해외 체류를 경험했고, 장학금을 받고 졸업했다.
낯선 땅에서 해가 지도록 이어지는 고된 일을 마친 밤,
온몸은 땀과 먼지로 젖어 있었지만 고개를 들자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흙냄새가 코끝에 스며들고, 바람은 선선했다.
그 순간 세상은 아주 고요했고, 나 혼자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 선명했다.
사회에 나가서는 최연소 실적왕을 달성했다.
회사에 다니며 8개월 공부 끝에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고,
영어 알파벳조차 모르던 내가 두 달 만에 토익 930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최근 제과·제빵 기능사 시험을 단 2주 공부로 초회차 합격했다.
그 멈춤과 시험들은 단순한 도피나 합격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나를 한 겹씩 되찾는 과정이었다.
지금도 그날들이 선명하다.
시험에 합격하고 아내와 축배를 든 날, 오븐에서 막 구워낸 빵을 꺼내던 순간,
암기력은 약했고 집중력은 산만했다.
하지만 목적이 분명해지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공부가 계급 이동의 거의 유일한 통로다.
좋은 대학을 가야만 기회가 열리고, 다른 길은 여전히 위험이 많다.
이건 아직도 바뀌지 않은 현실이다.
땅덩어리가 좁고 기회도 한정적이라 공부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승원에게는 최소한의 학습 습관을 심어 주되,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되지 않게 하고 싶다.
흥미와 재능이 보이면 끝까지 길러주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경험을 충분히 하게 할 생각이다.
아이의 하루가 성적과 비교에만 매이지 않도록,
놀이와 대화, 느긋한 시간이 함께 있어야 한다.
부모가 먼저 평정심을 보여주며 옆에서 “괜찮아, 다시 해보자”라고 말해주는 것,
그 한마디가 승원이에게는 버팀목이 될 것이다.
형은 형대로 옳았다.
나는 나대로 늦게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부모로서 내가 할 일은
승원이의 길이 형이나 나의 길과 같아야 한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같은 집에서 자랐지만 서로 다른 두 나무처럼,
승원이가 자기 방식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지켜보고 싶다.
어릴 적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답답함이 이제야 풀린다.
승원이가 생기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내가 왜 그렇게 엇나갔는지, 무엇을 찾아 헤맸는지.
내가 늦게 깨달은 나라는 사람의 모양을,
승원이는 조금 더 일찍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자란 승원이가 언젠가 스스로의 나무 그림자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