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의 시대, 욕망은 돌아서 흐른다

by 노경문

인간은 본능을 억누를 수 있을까.

아니, 억누르면 사라지는 걸까.


식욕, 수면욕, 성욕.

이 세 가지 욕구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다.


그중에서도 성욕은, 태생적으로 가장 은밀하고, 가장 복잡하며, 가장 억압받아온 감정이다.


먹고 자는 것은 당당히 말해도 괜찮은데,

왜 성을 말하는 순간 우린 조용해지는가.


그 침묵 속에서,

어떤 감정은 부풀고, 어떤 욕망은 비틀어진다.


성은 인류 문명과 함께 태어났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산업 중 하나가 성매매였고, 고대 그리스·로마, 중국, 중동의 문명에서도 이미 제도적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어떤 시대엔 신전의식과 연결되었고,

어떤 나라에선 국가 세수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욕망은 통제될 수 없다는 걸, 고대인들은 오히려 더 잘 알았는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가마다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성산업을 제도권에 편입시켜 세금, 건강검진, 노동권을 보장하며 관리하고 있다.

스웨덴은 구매자만을 처벌하는 '노르딕 모델'을 통해 성산업 자체의 구조를 문제 삼았고,


미국은 대부분의 주에서 금지되어 있으나 일부 지역은 합법적 구역으로 제한되어 있다.

일본은 탈법적 회색지대에서 산업이 거대화되었고,

한국은 법적으로 금지하면서도 사실상 방치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문득 그런 시절을 기억한다.

욕망에 휘둘리던 날들.

하루를 버텨내기 벅찼던 시절,

나는 그 허기를 무언가로 채워야 했다.

가장 손쉽고 빠른 도피처가, 성적 자극이었다.


그건 육체의 욕망이라기보단, 존재의 결핍에 반응한 마음의 외침에 가까웠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욕망은 종종 어두운 감정의 그림자로 나타난다는 걸.


나는 결국,

억누르는 대신 그 감정을 마주보는 법을 배워야 했다.

감정의 결을 따라가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어루만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욕망은 수치나 통제가 아닌

이해의 대상이 되었다.


포르노를 금지한다고 해서 성범죄가 줄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제도권 밖에서 벌어지는 비뚤어진 소비는 더 자극적이고 더 음침하다.


일부 연구들에서는 오히려 포르노가 성욕 해소의 통로로 기능하며 공격성을 낮출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 입장도 존재하며, 명확한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프록시를 뚫고, 웹하드를 뒤지며, 누구도 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인간의 욕망은 숨을 쉰다.

법은 그 숨소리를 듣지 못하고,

들어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모순을 관리한다는 말은, 사실상 방치와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속보다 먼저, 이해를 배웠어야 했다.


성은 가르치지 않으면서 금지당했다.

자연스러운 대화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욕망을 숨기는 데 능숙해졌다. 감추어진 욕망은 점점 음흉해졌다.

그리고 그 어둠은 어느 날 몰카가 되고, 디지털 성범죄가 되고, 'N번방'이 된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몰두했는지를 묻지만,

나는 오히려 이렇게 묻고 싶다.

왜 그 누구도 욕망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냐고.

왜 건강한 출구를 만들지 않고, 금지와 침묵으로만 누르려 했냐고.


성욕은 잘못이 아니다.

그것을 잘 다루지 못한 사회 구조가 문제다.


한국은 유독 성을 숨긴다.

포르노를 막고, 성매매를 밀어내고, 성교육을 생물 수업으로 바꿔버린다.

그 틈에서 사람들은 연애를 시작조차 못하고, 관계는 점점 조건의 게임이 되며, 많은 이들이 혼자 남는다.


우리는 이제 더는 사랑하지 못하는 세대에 가까워지고 있다.


성욕은 이 사회에서 쓸모없는 감정이 된 것이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있는 감정으로 전락했다.

감정은 점점 물질화되었고, 연결보다 계약을 먼저 떠올리는 시대.


그 안에서 사랑은 ‘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해선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사회에서 성욕은 트라우마처럼 여겨지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욕은 인간다움의 신호다.

기쁨을 느끼고 싶다는 본능, 누군가와 닿고 싶다는 마음, 살아있다는 감각. 그 모든 것이 이 욕망 안에 숨어 있다.


나는 예전보다 욕망에 덜 흔들린다.

하지만 그건 억제하거나 이겨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이제는 욕망은 나쁜 게 아니라, 내가 나로 존재하는 증거라는 걸 안다.

이해하고 다루는 법을 알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나를 해치지 않는다.


법은 통제할 수 있어도 감정은 통제할 수 없다.

규제할 수는 있어도 공감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이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욕망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건강하게 다룰 언어와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제는 솔직해져야 한다.

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이 나를 더 정직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묻는다.

욕망을 이해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병들지 않을 수 있을까.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