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니까 2007년이었고 넥센 히어로즈가 아직 현대 유니콘스라는 이름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을 때였다. 당시 나는 22살의 나이로 공부를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사회의 잉여구성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22살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2 나는 결국 군대에 입대해, 느적느적 GOP에서 몇 개월을 보내니 일병이 됐고 군대에서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막사는 분주했다. 크리스마스 준비로 분주한 것이 아니라 술 먹고 난 다음날 퍼붓는 똥 마냥 쏟아지는 눈 때문에 막사는 지랄 맞게 분주했다.
#3 하지만 나름 휴일이라고 부대에 있던 선임병을 포함 나는 나무 한 그루를 뽑아 막사 앞에 시멘트로 단단히 고정시켜 크리스마스 트리랍시고 만들었다. 순찰을 나온 대대장을 그걸 보더니 "여기에 소원 같은 걸 매달면 좋겠다."라는 지엄하신 군령을 남기시고 다른 소초로 서둘러 이동했다.
#4 전방에 눈은 펑펑 쏟아지고, 투광등은 눈에 아련 아련 쏟아져 집 생각만 간절하니 대부분의 선임병들은 <빠르게 전역하기> <사고 없이 전역하기> <전역하기> <전역하기...> 등등을 내걸었고, 나 같이 일병 혹은 그 밑에 얘들은 <군생활 열심히 하기> 따위의 말 같지도 않은 것들을 소원이랍시고 매달았다. 군대는 원래 밥 안되면 그런 곳이다. 하지만 일부 개성 있는 장병들은 틀에 박힌 소원이 아닌 진짜 자신의 소원을 적기도 했다. < 여자친구 만들기 > 혹은 < 철들어서 효도하기 > 등의 소원을.
#5 나는 후반야 근무를 마치고 침상에 누워 무슨 소원을 적을까. 고민했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지만, 군대에서는 이런 생각이라도 해야 시간이 잘 갔다. 나름 고심해서 소원카드를 적고 다음 근무 때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었다. 소원은 <세계평화>였다.
#6 <세계평화>라는 소원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대장이 다시 소초를 방문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처음과는 다르게 전구도 몇 개 달아 정말 트리처럼 보였고, 장병들의 많은 소원으로 정말 산타가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성차 보였다. 대대장은 내가 있던 근무지에 오더니 말을 걸었다. "네가 걸었던 소원이 뭐냐?" 나는 당당하게 "세계평화 임다"라고 말했다. 대대장은 그 자리에서 피식 (정말 피식이 었다) 웃더니 "그런 거창 한 건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라는 말을 하고 다른 근무지로 이동을 했다.
#7 <세계평화>라는 소원을 건 크리스마스 트리는 다음해가 되어 막사 뒤편 쓰레기장에 버려졌다. 그리고 그 소원을 적었던 나는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면서 전역만을 꿈꾸는 말년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바쁘게 사회에 나와 그런 소원 따위는 잊어 버리게 됐다.
#8 그래서일까? 좀처럼 <세계평화>는 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에 다시 한번 <세계평화>라는 소원을 걸고 하느님, 부처님, 기타 등등 님들에게 기도를 드리려고 한다. 세계는 아직 평화롭지 않다.
2015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