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DigiLog 세대
나는 미용실 유목민이다. 컷이나 염색을 맘에 들게 하는 헤어 디자이너도 드물고 손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만났다 싶으면 곧 그만두거나 원격지로 떠나서 다른 헤어숍을 물색하는 일이 빈번했다. 아직도 정착을 못했는데 이번에는 갈만한 곳을 찾기 위해 ChatGPT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원하는 헤어스타일, 집에서의 거리까지 추가로 알려주었더니 몇몇 가게의 이름을 제시했다. 나는 해당 숍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헤어 사진을 살핀 후 가장 테크닉이 좋아 보이는 디자이너를 선택하고 예약까지 했다. 머리를 손질하러 간 날 위치를 보니 성수동 서울숲 부근이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재미난 장소를 바로 옆에 두고도 들르지 못한 게 아쉬워 얼마 후 서울숲을 다시 찾았다.
서울숲이 위치한 성수동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자동차 공업소와 소규모의 봉제, 금속, 가죽, 염색, 구두 공장이 모여 있던 지대였다. 매연과 기계 소리로 뒤덮였던 이 동네가 도시 재생 활성화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풀냄새 가득한 서울숲이 조성되고 카페와 팝업 스토어가 즐비한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서울숲은 뉴욕의 센트럴파크처럼 도시 한가운데에 넓은 잔디밭과 크고 작은 숲이 모여 있어 펼쳐지는 풍경 자체가 아름답고 남녀노소 누구나 산책하거나 휴식하기 좋다. 뿐만 아니라 자연 그대로를 즐길 수 있는 벚나무길, 메타세쿼이아길, 은행나무길, 연못 같은 환경이 여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전에 방문해서인지 달리기 하는 사람이 눈에 많이 띈다.
근처에는 서점, 꽃집, 소품 가게처럼 손으로 만지고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아날로그 감성 충만한 공간도 더러 있는데 오늘 발견한 최고의 아날로그 감성 품목은 공원 내에 있던 소원돌탑이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서울 한복판에 있어도 소원을 이루기 위한 염원을 담아 돌을 쌓아 올리는 마음은 그대로인가 보다.
한편 공원 곳곳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QR코드가 있어 스마트폰으로 주변 장소나 식물에 대한 정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주변 카페는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고 와이파이 시설이나 콘센트가 준비되어 있어 노트북 작업과 같은 디지털 생활에 최적화되어 있다. 음식점에서도 좌석에 설치된 태블릿 PC의 테이블오더 시스템을 이용해 비대면으로 주문을 받는다.
한마디로 서울숲 공원길은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아날로그적인 환경과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곳이다. 나는 아날로그 취향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디지털이주민 세대이다 보니 이런 복합적인 장소가 낯설지 않다. 우리 세대는 운이 좋게도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정서를 모두 경험했기에 두 가지의 조화와 균형을 맞추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세대 사람은 어떨지 궁금해서 한 번 살펴보았다.
내가 속한 X세대는 보통 1960년대 중반을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까지 태어난 사람들로 정의한다. 이전 세대와는 분명히 다른데 딱히 정의할 용어가 없다는 뜻으로 미지수 ‘X’를 붙여 만든 용어라고 한다. 이 세대는 한국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던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요를 누렸으므로 경제 성장보다는 자유와 평등에 관심을 보였다. 기성세대와 다름을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세련된 패션을 추구하기도 했다. 이들은 도시에서 살아도 농촌의 마을 공동체 의식이 남아 있어 이웃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자랐다. 시스템적으로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하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디지털 인프라가 다소 부실한 여건에서 성장했다.
다음 Y세대는 매사에 긍정적으로 ‘Yes’라고 답하는 세대라는 의미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고 하는데 대개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이들이다. 민주화 이후 정치적으로 안정된 사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정치에는 무관심 하지만 개성과 다양성에 가치를 두고 즐거움을 중시한다. 지적 호기심이 많고 유행에도 민감하며 소비 지향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사회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이므로 21세기의 주역이 될 세대라고 해서 밀레니엄 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소유하고 인터넷을 통한 검색, 구매, 오락, 커뮤니티 활동을 즐기는 문화가 일반화된 첫 세대이므로 디지털 세대라고도 한다.
Z세대는 주로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태어난 사람들을 지칭한다. 유년기부터 스마트폰의 대중화를 경험한 세대로 SNS나 동영상 매체를 이용하여 개성을 표출하고 불특정 다수와 취미를 공유하려는 욕구가 강한 세대이다. 차별이나 불평등과 같은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데 적극적이지만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은 꺼리는 편이다. 실업이나 빈부 격차 등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불확실한 미래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을 보인다.
Z세대에 이어 2010년대부터 202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이들은 알파 세대로 분류한다. 호주의 사회학자가 새로운 시작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알파벳을 사용해 만든 용어라고 한다. 이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같은 디지털 기기를 접했기에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 즉 디지털원주민 세대이다.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하고 유튜브나 틱톡 등 동영상 플랫폼을 매우 친밀하게 여긴다. 어릴 때부터 취향에 맞는 영상을 골라 보며 자랐기 때문에 개성이 두드러지고 재미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상공간을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로블록스나 제페토 같은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소비하거나 돈을 버는데도 익숙하다.
정리해 보면, X세대를 제외한 Y세대부터는 아날로그를 일부 경험했지만 디지털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다. 편리함으로 인간을 유혹하지만 결국 인간의 일상을 지배하는 디지털의 배신을 딛고 이들이 진정 행복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어령 교수는 《디지로그 선언》이라는 책에서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디지로그(DigiLog)’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세상만사가 숫자인 디지털로 바뀔 수 있어도 어금니로 씹는 맛만큼은 디지털화할 수 없고 이를 미디어에 담을 수 있는 세상이 디지로그 세계라고 정의한다.
0과 1로 구성된 디지털 세계에 모호한 아날로그 감정이 끼어들 틈 같은 건 없어 보이지만 디지털 신호가 전달하는 것 이외의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서 사람들은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화상 채팅을 한다고 설명한다. 손으로 직접 쓴 편지가 이메일보다 더 깊은 감동을 주고 음악을 듣기에 스트리밍이 더 편리하지만 LP를 듣거나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경험이 더 깊이 있는 감성을 전달한다는 데는 이견을 내기 어렵다.
디지로그는 단순히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장점을 합치는 게 아니라 틀에 박혀 있는 제도와 문화에서 벗어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퓨전과 하이브리드 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디지털은 숫자가 아닌 것까지 숫자로 만들려고 하지만 아날로그는 사랑이나 인생처럼 정의하거나 수치화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한국은 언어뿐 아니라 음식이나 행위가 논리적이지만 동시에 말로 표현하기 어렵게 애매한 부분이 많아서 한국인에게 디지로그는 가장 적합한 문명이라고 설득한다.
머리는 디지털 세상에, 몸은 현실인 아날로그 세상에 살면서 겪게 되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둘을 결합시키고 조화를 이끌어냄으로써 더욱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의 혁명이라고 떠들썩하게 등장한 디지털 기술은 부작용과 문제점을 드러내며 다시 아날로그 감성을 되돌아보도록 만들고 있다. 디지털 문화와 아날로그 정서를 이어주는 디지로그의 힘이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게 된 이유다. 인공 지능까지 나오면서 디지털 기술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감성과 창의성을 지닌 인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디지털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은 여전히 아날로그적 존재이다. 삶은 온라인 게임처럼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가상 세계처럼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다른 세계로 이동할 수도 없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오감을 느끼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개성을 표현한다.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감성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미래 사회에서 우리가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