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선 뒤에서 다시 출발하는 법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12월의 겨울.
미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고른다.
이곳은 숨 막히는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 찬 도시가 아니다.
록키 산맥의 품에 안긴 작은 타운, 캐나다 앨버타 주 캔모어다.
흙과 나무의 냄새가 공기 사이를 채우고, 산의 적막이 마음을 넓힌다.
찬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정돈한 뒤, 천천히 심호흡을 해본다.
4초 동안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7초 멈추어 고요를 채운 뒤,
8초 동안 입으로 길게 후— 내쉰다.
흙, 바람, 나무. 자연의 에너지가 몸 안으로 스며들듯 충전된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삶의 길과 속도, 목적을 가진다.
반환점을 막 지나 ‘메인 퀘스트’를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는 미진이 역시 그렇다.
오래전부터 그녀는 서울의 34평 아파트를 소유하고,
월 500만 원의 수입을 기반으로 부동산 투자와 임대 수익을 그리고,
좋은 배우자와 커리어 성장을 목표로 삼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목표의 언저리에 닿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목표가 거의 완성된 지금,
그녀의 마음엔 새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성취 이후, 행복은 과연 어떻게 생겨야 하는 걸까?
목표를 향해 달리는 과정은 강한 동력을 준다.
도파민의 보상이 집중과 성장의 연료가 된다.
그러나 성취 후에는 그 동력이 급히 꺼지듯 가라앉는다.
행복보다 긴장 상태에 있는 나가 더 익숙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취해도 또 비교하고, 다시 목표를 세우고,
만족의 자리는 없이 반복되는 루프.
성취의 기쁨 뒤에 찾아오는 공백.
심리학에선 이를 ‘성취 후 공허(Post-achievement emptiness)’와 유사한 현상으로 설명한다.
결승만 보고 달린 경주가 끝나버린 순간,
기쁨 대신 익숙한 긴장감을 잃은 낯섦이 남는 것이다.
그럼 행복이란 뭘까?
나는 행복을 세 가지 모습으로 이해한다.
1. 감정으로서의 행복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맛있는 걸 먹을 때 느껴지는 설렘과 웃음, 즐거움.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이다.
2. 상태로서의 행복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 잘 흘러가고 있다는 안정감.
삶 전반에 대해 ‘괜찮다’고 느끼는 충만이다.
3. 의미로서의 행복
단순 즐거움을 넘어 삶이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느껴질 때 피어나는 행복.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 목표를 향해 성장할 때 스며드는 감각이다.
행복의 역치와 의미의 방향은 모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분명하다.
올바른 마음과 행동, 그리고 덕을 따르는 삶이 행복의 뿌리라는 점.
“행복은 덕에 따라 영혼의 탁월함을 발휘하는 활동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행복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올바름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태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힘든 친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배려의 덕
하기 싫어도 옳기 때문에 내딛는 용기의 덕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중심을 잡는 절제의 덕
최선의 선택을 판단하는 지혜의 덕
성취의 경주가 끝난 순간에도 삶은 멈추지 않는다.
미진이는 이제 안다.
비교와 공허에 끌려가기보단,
행복의 다른 얼굴을 다시 정의하고 실행할 구간에 와 있다는 것을.
목표는 또 생기면 되고, 의미는 새로 부여하면 된다.
결승선 뒤엔 빈 트랙이 아니라,
다시 설계해야 할 새로운 길이 놓여 있을 뿐이다.
어쩌면 행복이란,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덕을 쌓으며 기쁨을 허용해주는 삶의 태도 그 자체가 아닐까.
경주의 종료가 공허의 시작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 신호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오늘도 산을 올려다보며 숨을 들이쉬는 미진이처럼,
우리도 완성 뒤의 자신에게 부드럽게 말해주면 된다.
잘 달렸다고.
이제, 다시 살아보자고.
그 말 끝에 남는 잔향이,
우리가 기대해야 할 다음 행복의 첫 문장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