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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 에이드 Apr 30. 2022

[소설]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28)

그대로 있어 주면 돼 (by 장필순)

그 때 처음으로 헤어짐에 대하여 생각했어요. 일방적인 관계, 일방적인 연애, 일방적인 사랑... 알면서도 외면했었던, 이제껏 쌓여있었던,  검은 봉투에 담아 마음속 한켠에 쳐박아두었던 불만들... 그날을 계기로 봉투에 구멍이 뚫리고 그 사이로 버려놨던 감정들이 새어나왔었나 봐요. 이제껏 고여있던 불만들이 마음속에 퍼지면서 헤어짐이라는 냄새를 풍겼죠. 그 냄새는 내 머리가 망각하고 있었던 불안을 끄집어 냈어요.


쟤는 널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좋다고 하니 마지못해 만나는 것이다. 나 혼자만 좋아하는 것이다. 혼자하는 연애는 연애가 아니다. 쟤는 아직 너한테 사귄다는 말도 한마디 안했다.


그런데요. 아까전에 제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했죠? 과연 내가 얘랑 헤어질 수 있을까? 그 답은 진즉에 알고 있었어요. No. 절대로 헤어질 수 없었어요. 마음이 알고 있었어요.


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건 알고 있다. 그래도 받아줬다. 그때 다짐하지 않았는가? 이제 시작이다. 아니, 다짐은 그 전... 더욱더 전에 이미 했었다. 나는 얘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고 싶다. 얘를 위해서 살고 싶다. 내가 사랑받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더 이상 얘를 잃고 싶지 않다. 더이상 얘한테 아무것도 못해주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 바보같죠? 그냥 호구. 지금 생각하니 그 생각밖에 들지 않네요. 아마도 걔를 잡을 기회를 놓쳤었기 때문에, 그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힘들어도, 내가 사랑받지 못해도... 그래도 걔가 옆에만 있어준다면, 그냥 행복해지기만 하면 된다. 그게 마음 한 가운데 크게 자리잡고 있었어요. 로봇같은걸로 치면 최우선순위 명령어같은 거라고 할 수 있죠. 그게 설령 바보같아도, 멍청하더라도, 그땐 난 그 마음속에 자리잡은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힘든건 힘든 거였고, 새어나오는 불만은 계속 새어나왔죠.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머리와 마음의 싸움, 불만과 다짐의 모순으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결국 걔한테 전화를 했어요. 걔가 전화를 받았어요. 지금 만날 수 있냐는 말에 운동 중이라 힘들다고 했어요. 숨이 좀 거칠긴 했어요. 급작스러웠지만 늘 그랬듯 또다시 거절당했죠. 그 한마디에 전 참지 못하고 걔한테 물어봤어요.


난 도대체 너한테 뭐야? 우리 사귀는거 맞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가쁜 숨이 점점 잦아들었어요. 걔한테 바로 대답은 나오지 않았어요. 나는 아무말도 안하고 걔가 대답을 하기를 기다렸어요. 그렇게 몇십초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몇시간 같았던 침묵을 먼저 깬 건 걔였어요.


전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선배 생각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요. 항상 똑같아요.


아, 무슨 얘길 하고 싶은지 알아요. 뭔가 태클을 걸고 싶겠다마는 일단은 참아줘요. 여기서 태클걸면 이야기 진행이 안되니, 어쨌든 지금은 그려려니 해주세요. 어쨋든 난 그냥 그 한마디에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어요. 그 말을 듣고 전 순진하게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를 싫어하지 않는구나. 여전히 난 좋은 선배구나. 그래, 그거면 됐어. 


그리고 난 울면서 수화기 너머로 이런 얘길 했던거 같아요. 난 니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계속 불안했다. 이러다 더이상 니 엎에 있지 못하는거 아닌가... 라고 했었나봐요. 솔직히 그때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말해서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 안나요. 수화기 너머의 걔는 좀 얼떨떨했을꺼예요. 조금 당황하는 듯 했는데, 이내 밝은 목소리로 선배 안 싫어한다고, 늘 고맙다고, 불안하게 해서 미안했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오늘 운거 평생 기억할 거라면서 농담도 던져줬어요. 난 그저 걔 얘길 듣고 아냐 내가 갑자기 전화해서 쓸데없는 소리 하고 같은 말을 하면서 사과했던거 같아요. 그리고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전화를 끊었고, 난 울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혼자서 베개를 껴앉고 뒹굴었어요. 그 날 모든 불만과 불안은 사라지고 간만에 편안히 잠들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분기점이자... 돌이킬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던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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