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록 - 2023년 5월 어느날
택시 안에서 친구를 데려다주고 혼자 남았다. 한강을 가로질러 올림픽대교를 지나는데 갑자기 기사님이 말을 꺼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죽음을 생각하게 돼요.” 무슨 말이지 싶어 들어보았다. 자신은 고등학교 1학년때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이유인즉슨 어린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서라고 했다. 어머니는 19살에 자신을 낳고 남자 하나 만나지 않고 힘들게 아들을 키웠다. 함께 피난을 다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내가 없으면 어머니가 좀 더 편하게 살지 않을까. 그렇게 힘들게 키웠는데 다 큰 자식이 죽어버리면 어머니가 더 불쌍했을 게 아닌가 혼자 생각한다.
그는 끈질기게 죽음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며 문득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그는 퇴직공무원으로 쉰 적 없이 줄곧 일만 했다. 일이 곧 삶이고 취미이고 즐거움이다. 승무원은 아니지만 20여 년간 공항에서 일하며 세계 곳곳을 다니는 공무원이었다. 세상에 그런 공무원이 있다니 놀랍다고 맞장구를 쳤다. 1987년 일어난 KAL기 폭파사건 이후 비행기 테러에 대비해 모든 항공기에는 무장한 경찰이 탑승했다. 자신은 비행기 보안관으로 표를 끊고 비행기를 타는 것이 일이었다.
그렇게 20년간 비행기를 탄 덕분에 여행은 절대로 가기 싫다고 했다. 4시간 거리의 동남아도 비행시간이 너무 지겨워 갈 수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또 생각한다. 그나마 두둑한 공무원연금으로 노후걱정 없이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을 텐데 왜 택시를 하면서 사서 고생을 하시는가. 자식들은 장성하여 제 밥벌이를 하고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모시면서 손주들에게 매달 용돈을 주는 성실한 할아버지는 왜 혼자서 죽음을 고민하고 있을까. 그가 죽기로 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처럼 자신이 없어야 자식들이 행복하리라. 정년이 훌쩍 지난 노인은 자신이 갈 곳은 이제 요양원밖엔 없다고 믿는다.
평생을 일하며 가족을 건사하고 난 뒤에야 스스로 무(無)가 되었고, 이제는 존재 자체가 수치로 무장한 탈영병처럼 어딜 가든 눈치를 보면서도 자유롭게 삶을 빠져나가고 싶다. 한참이 지나고 가로등 불빛에 얼굴이 비친다. 그제야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 가느다란 백발에 주름이 가득하고 야윈 얼굴의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잘 가라고 인사한다. 모든 존재는 숙명처럼 수치가 되고, 또 수치를 받아들이면서 성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