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좋은 세상
나를 언짢게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상대방도 나도 나쁜 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지?' 하고 질문하세요. '나한테 왜 그랬어?' 말고 '내가 왜 화가 났지? 내가 모르는 게 뭘까?'라고 물어야 감정의 자기 인식이에요. 상대방이 어딘가에서 무슨 일을 당해서, 혹여 심각한 병에 걸렸음이 확인돼서 나한테 기분 나쁘게 굴었을 수도 있잖아요.
- 전헌 '다 좋은 세상' 중에서
내게는 사람 때문에 기분이 나쁠 때 쓰는 마법의 주문이 있다. 전헌 교수의 '다 좋은 세상' 책에 나오는 '내가 모르는 게 뭘까?'이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게 굴어도 그냥 내가 모르는 뭔가 있겠거니 생각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회사에 은근히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소외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데, 유독 그 사람과 있을 때 소외감을 많이 느꼈다. 하루는 야근을 하면서 남은 사람들끼리 밖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들어오기로 했다. 그 사람을 포함해서 넷이서 나갔고, 그분이 낮에 중요한 보고를 해서 주로 그 보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나를 빼고 나머지 두 명하고만 대화를 했다. 나도 나름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내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나머지 두 명에게만 말을 건넸다. 당시에는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에 대해, 내가 가장 덜 중요하거나 영향력이 적은 사람이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을 했었다. 한 명은 팀장님이었고 다른 한 명은 파트장 역할을 하는 분이었다. 혹은 평소에도 말이 별로 없는 내가 그 사람 말에 제대로 공감해 줄 수 없을 거라 여겨서 그랬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 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포함해서 여럿이 대화하는 자리에서 가끔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나는 또 소외감을 느꼈다. 좀 더 나를 배려해 줄 순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웠다.
그러다가 그 사람과 며칠 붙어서 같이 일 할 기회가 생겼다. 원래도 꼼꼼한 성격인 것은 알았지만,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굉장히 책임감 있게 챙기고 유관부서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도 명확하게 잘했다. 나에게도 자주 찾아와 서로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은 없는지 여러 번 체크를 하고 사소한 부분도 같이 논의를 했다.
하루는 내 자리로 찾아와, 오늘 하루 어땠냐며 말을 걸더니, 갑자기 이것저것 요청했는데도 같이 잘 챙겨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업무 일정이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서 정신없이 보냈는데, 생각해 보니 너무 고맙더라며 빙그레 웃고 갔다.
같이 일을 하게 된 후에는 식사 자리에서 전과 다르게 나와의 공통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에게 적극적으로 말도 걸고 눈도 자주 마주치며 이야기를 잘했다. 생각해 보면 그 사람도 단지 내향적인 사람이라 딱히 친하지 않은 나에게 할 말이 적었을 뿐이고 낯을 가렸던 게 아닌가 싶다.
일을 마무리한 날, 느지막하게 퇴근하려고 자리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그 사람이랑 마주쳤다. '고생했어요.' 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길래 나도 환한 미소로 보답했다.
전헌 교수의 말이 맞다. 상대방 때문에 뭔가 불편한 게 있어도, 상대도 나도 좋은 사람이고 단지 내가 모르는 게 있을 뿐인 거다. 알고 보면 다 좋은 사람이다.
한 번은 집을 나서는데 버스 올 시간이 다 되어 뛰어가면서 어떤 여자분을 앞질러 가게 되었다. 그러다 집에 무언가 놓고 온 게 생각나 멈칫하면서 순간 그 여자분 앞을 막아서게 되었는데, 바로 뒤에서 "아이씨"하고 짜증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길을 막으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사소한 것 가지고 내게 짜증을 낸다는 생각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어쩌다 보니 그 여자분과 같은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서서 버스를 기다리게 되었는데,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러다 마법의 주문을 떠올렸다.
'내가 모르는 게 뭘까?'
그 여자분도 급한 일이 있어 바쁘게 길을 나서는 중이었는데 내가 앞을 막아서서 순간적으로 화가 났을 수 있다. 집을 나오기 전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최근에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고 오늘 마침 화가 났을 수 있다. 화를 내고 나서 금세 후회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답답하고 꿍했던 마음이 싹- 내려가면서 기분이 나아졌다. 상대방은 좋은 사람이고 잠깐 화가 날 수도 있었겠다 이해하고 나니, 무엇보다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법의 주문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