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도서관의 탄생, CX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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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도서관의 탄생, CXL (Compute Express Link)/
이 여는 '확장'의 시대-
HBM시 대에서 CXL시대로
HBM이 '수직적 속도'였다면, CXL은 '수평적 확장'
병목의 이동: 속도 다음은 '그릇'이다
HBM이 GPU라는 천재 배우에게 폭발적인 대사 전달력(대역폭)을 선물했다면, 이제 AI는 또 다른 벽에 부딪혔다. 배우가 아무리 말을 빨리 해도, 무대 뒤 서재에 꽂힌 책이 부족하면 연기는 멈춘다.
현대 AI 모델은 인간의 뇌를 닮아가며 수조 개의 파라미터를 삼킨다. 이 거대한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수 테라바이트(TB) 급의 메모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서버 구조에서는 CPU 하나가 관리할 수 있는 D램의 슬롯 수에 물리적 한계가 있다.
이 '그릇의 한계'를 깨부수기 위해 등장한 규격이 바로 CXL(Compute Express Link)이다.
CXL: 경계를 지우는 혁명
기존의 메모리 구조가 각자의 방에 갇힌 독방 모델이었다면, CXL은 모든 방의 벽을 허물어 거대한 광장을 만드는 기술이다.
무한 확장: 기존 시스템을 갈아엎지 않고도 USB를 꽂듯 메모리를 추가해 용량을 수십 배로 늘릴 수 있다.
메모리 풀링(Pooling): 여러 대의 서버가 하나의 거대한 메모리 창고를 공유한다. 노는 메모리 없이 필요한 곳에 즉시 자원을 배분하는 '공유 경제'의 실현이다.
삼성의 역습 — CXL이라는 새로운 판
HBM 전쟁에서 삼성은 졌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의 손을 잡고 AI 메모리 시장의 왕좌를 차지하는 동안, 삼성은 수율 문제로 발목이 잡혔다. 숫자는 냉혹했다. 2025년 HBM 시장점유율 — SK하이닉스 57%, 삼성 22%.
그런데 삼성은 지금 다른 판을 짜고 있다.
그릇이 작으면 아무리 빨리 부어도 넘친다
HBM은 속도의 기술이다. GPU라는 천재에게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밀어 넣느냐의 싸움. 그런데 AI 모델이 커질수록 새로운 문제가 터진다.
속도가 아니라 용량이다. 아무리 빠른 수도꼭지를 달아도, 물탱크 자체가 작으면 소용없다.
현재 서버 구조에서 CPU 하나가 관리할 수 있는 메모리 슬롯은 물리적으로 정해져 있다. 거대 AI 모델이 요구하는 수백 TB의 메모리를 담을 그릇이 없다. 이 벽을 부수는 기술이 CXL이고, 삼성은 업계 최초로 2021년 CXL 기반 메모리 모듈 CMM-D를 출시하며 이 판에 가장 먼저 발을 들였다.
담장을 허무는 자가 땅을 얻는다
CXL의 본질은 단순하다. 각 서버가 쌓아온 메모리의 경계를 없애는 것. 서버 A의 남는 메모리를 서버 B가 즉시 가져다 쓰고, 수십 대의 서버가 하나의 거대한 메모리 창고를 공유한다.
USB 꽂듯 메모리를 추가해 용량을 수십 배로 늘리고, GPU는 그 거대한 창고에서 필요한 데이터를 마음껏 꺼내 쓴다. 병목이 사라진다.
SK하이닉스도 이 흐름을 읽었다.
CMM-Ax라는 야심작을 내놓으며 한 발 더 나아갔다 — 메모리가 스스로 연산까지 하는 개념. 아이디어는 훌륭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상용화는 특정 고객 파일럿 수준에 머물렀고, CXL 컨트롤러조차 중국 Montage에 의존하다 이제야 TSMC 외주로 자체 개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 GPU가 있는데 메모리가 굳이 연산까지 해야 할까? CXL로 병목이 충분히 해소된다면, CMM-Ax의 존재 이유 자체가 흐릿해진다.
SK하이닉스는 미래를 너무 앞서 선점하려다 현재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삼성의 보이지 않는 칼
삼성의 강점은 화려하지 않다. 자체 파운드리로 CXL 컨트롤러를 내재화할 수 있는 유일한 회사.
메모리부터 컨트롤러, 소프트웨어 스택, 서버 에코시스템까지 수직 통합할 수 있는 구조.
CXL 컨소시엄의 핵심 멤버로 표준 자체를 설계하는 위치.
HBM은 단품 기술력 싸움이었다. 삼성이 진 싸움. 그런데 CXL은 시스템 전체를 설계하는 싸움이다. 삼성이 수십 년간 갈고닦은 바로 그 영역이다.
CMM-Ax가 시장에서 검증되는 순간, 삼성은 자체 파운드리와 수직통합 역량으로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다.
HBM에서 삼성이 당한 것과 정반대의 구도가 CXL에서 펼쳐질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HBM으로 현재를 지배하며 CMM-Ax로 미래를 선점하려 했다.
삼성은 CXL이라는 판 자체를 키우면서, 미래가 오기 전에 현재를 장악하는 전략을 택했다.
보이지 않는 지배자의 얼굴이 다시 한번 바뀌려 하고 있다.
삼성이 CXL에 '올인'하는 이유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속도'라는 날카로운 창으로 먼저 승기를 잡았다면, 삼성은 CXL이라는 '거대한 판'을 짜는 데 주력하고 있다.
여기에는 삼성만이 가진 독보적인 강점이 숨어 있다.
삼성이 CXL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이유는 명확하다. HBM은 메모리 단품의 기술력이 중요하지만, CXL은 메모리를 제어하는 컨트롤러, 이를 구동하는 소프트웨어, 그리고 서버 전체를 아우르는 '시스템 생태계'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과거 '관리의 삼성'이 가진 시스템 통합 능력이 이제는 '혁신의 삼성'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삼성은 CXL 컨소시엄의 핵심 멤버로서 단순히 칩을 파는 제조사를 넘어, AI 인프라의 표준을 설계하는 설계자로 거듭나고 있다.
비움으로써 채우는 이치: 虛而不屈 動而愈出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했다. "공간이 비어 있기에 꺾이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 기운이 나온다(虛而不屈 動而愈出)." 결국 스스로를 비우고 유연하게 변화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것 아닐까.
CXL의 본질은 '비움과 연결'에 있다. 각 서버가 가진 메모리의 경계를 비워내고 하나로 연결할 때, 비로소 AI는 멈추지 않는 지능의 흐름을 얻는다. 삼성이 HBM4에서 '관계의 기술'을 배웠다면, CXL에서는 '상생과 확장의 기술'을 증명하고 있다.
에필로그: 지배자가 남긴 화두, 진보는 폐허 위에서 꽃핀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독주를 보며 그것이 영원한 승리라 착각한다. 그러나 반도체 전쟁의 현장에서 목격하는 것은 승자의 대관식이 아니라, 끊임없는 '지배자의 교체'라는 이름의 진보다.
HBM이 100미터 달리기의 폭발력이라면, CXL은 마라톤 코스 전체를 관리하는 운영 체계다.
이제 반도체 전쟁은 단일 부품의 성능 경쟁을 넘어 '누가 더 거대한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는가'로 넘어가고 있다.
삼성과 SK하이닉스, 그리고 마이크론과 TSMC.
한때는 고착화된 관료주의로 비판받던 삼성이, CXL이라는 '비워진 공간'을 표준화하며 다시 주도권을 쥐려는 모습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순환 같다.
지배자는 자신의 승리를 증명하려다 과거에 묶이고, 도전자는 그 승리의 빈틈을 보며 새로운 판을 설계하는 것이 흥미롭다.
보이지 않는 지배자들의 연합과 전쟁 속에서 인류는 유례없는 '지능의 풍요'를 맞이하고 있다. 이 거대한 도서관의 문이 활짝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AGI(인공일반지능)의 뒷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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