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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온도

우리가 사랑을 확신하는 순간들

by 디테일즈 매거진


‘첫눈에 반하다’라는 표현은 내게 그리 당연치 않다. 자신의 감정을 확신하는 시점은 모두 다르기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라고 말하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나에게 사랑이란 무거운 감정이다. 마치 좋아함을 넘어설 만한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한 감정이다. 그래서 그 증명의 존재를 찾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우리의 관계를 사랑이라 말해도 되는, 명확한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열역학은 물질의 상태 변화 지점을 지칭하기 위해 ‘녹는 점’과 ‘끓는 점’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Group 1.png 1기압에서 물의 녹는 점과 끓는 점 그래프.
녹는 점 : 고제 물질이 액체 상태로 변하기 시작하는 온도
끓는 점 : 액체 물질이 끓기 시작하는 온도

녹는 점과 끓는 점을 통해 어떤 물질의 상태가 바뀌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면, 사랑에도 이 개념들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스물다섯 스물하나> 속 이진과 희도의 관계는 ‘무지개’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끝내 그 관계는 무지개가 아닌 사랑으로 정리된다. 이진과 희도의 관계가 무지개에서 사랑으로 바뀌는 동안, 그 관계가 녹아내리고 끓으며 변화한 순간들을 그들의 시점에서 찾아보려 한다.




이진의 녹는 점_ 2화. 학교 운동장에서의 물장난

아버지의 빚으로 인해 어린 동생과 도망쳐 온 서울. 그러나 도망쳐 온 그곳까지도 찾아 온 피해자들을 보며 이진은 의도치 않게 자신이 그들의 행복을 앗아갔다는 죄책감에 빠진다. 그리고 이진은 그 죗값을 치루기 위해 그들 앞에서 다신 행복해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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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진에게 희도는 자꾸만 엉뚱한 모습만 보인다. 이진의 암울한 다짐을 들은 희도는 자신과 함께 있는 동안만은 아무도 모르게 행복하자며, 철없는 말을 내뱉는다. 이진에게 있어 희도는 <풀하우스> 광팬이자 다혈질이고 막무가내 말괄량이, 그저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이진은 희도를 또 다른 존재로 기억한다. ‘내가 버려야만 했던 행복을 너무 쉽게 가져다 준 사람.’



희도의 녹는 점_ 4화. 늦은 밤 체육관 펜싱 연습

시대에게 빼앗겼던 꿈을, 역설적이게도 그 시대가 되살렸다. 희도는 펜싱 국가대표 선수권의 마지막 자리를 얻기 위해 쉴새없이 연습했지만,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꿈을 이루지 못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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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싱 선수로서 뚜렷한 성과가 없는 자신을 의심하던 희도에게 이진은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많은 실패는 단단한 내공의 방증이라는 것. 평생을 함께 한 엄마조차 보지 못한 자신의 가능성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이진은 발견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알려주는 것보다 더 전달력 있는 응원이 있을까. 이진의 진심 어린 응원이 희도에게 와닿은 순간이었다.



이진의 끓는 점_ 5화. 희도가 남긴 음성사서함

희도와 몰래 되찾았던 행복도 잠시, 이진에게 닥친 현실은 자꾸만 캄캄해진다. 아버지를 쫓던 빚쟁이들이 동생의 학교까지 찾아온 것을 보며, 이진은 그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또 도망쳤다. 이후 이진은 외삼촌의 집에서 생선 파는 일을 시작했지만, 체력적인 한계보다도 동생마저 부끄럽게 여기는 자신의 처지가 더 고달팠다.


우연히 TV로 만난 희도는 더 눈부시게 성장해 있었다. 당당히 펜싱 국가대표가 된 희도를 보며 이진은 기특함과 동시에, 말도 없이 떠난 것에 미안함을 느꼈다. 희도에게 다시 연락하는 것이 망설여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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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은 예상치 못하게 희도가 남긴 음성사서함을 듣는다. 수화기 너머의 희도는 이유도 모른 채 사라진 이진을 원망하기보다, 어딘가에 있을 이진에게 자신의 응원이 닿길 바라고 있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가서 닿겠다고 말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숨었던 이진은, 사실 자신을 찾아 줄 누군가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비록 지금은 몰락한 집안의 장남 처지일지라도,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임을 누군가가 말해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자리에 희도가 있었다.



희도의 끓는 점_ 9화. 무지개는 필요 없어

희도에게 이진은 골치 아픈 존재였다. 좋아함, 열등감, 짜증남 - 희도가 이진에게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 복합적이었다. 연인도, 지인도 아닌 이진은 희도의 세상에서 아직 ‘정의되지 않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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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희도는 구사일생의 순간을 이진과 함께 이겨냈다. 그리고 희도는 이진이 말하는 서로의 관계에 ‘무지개’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서로를 이끌고 응원하는, 좋은 곳을 향하도록 돕는 그런 관계. 내리는 비를 거쳐야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관계성이 함께 성장하고 있는 서로의 모습과 닮아 보였다. 그러나 이진은 예상외의 말을 남긴다. 이건 사랑이라고. 더 이상 무지개는 필요 없다고.


희도에게 사랑이란 <풀하우스>에서 보던 짜릿하고 강렬한 것, 짧막한 연애로 느껴 본 달달한 감정 정도였다. 남녀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조금은 자극적이고 휘발적인 감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희도는 은은하게 보이는 저 무지개도 사랑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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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을 확신하는 순간

서로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던 두 사람은 최종화에서 결국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은 희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현실적인 엔딩이 유독 시청자들의 아쉬움을 자아낸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랑이 아닌 무지개로 시작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어제와 달리, 유독 상대의 존재감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상대가 내 일상에 녹아들기 시작하는 순간, 그 시작점에 대해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무지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그 특별함의 이유를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으로 정의할 확신이 들 때, 그 관계의 온도는 끓는 점에 도달했을 것이다. 희도와 이진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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