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_미시마 유키오

그것은 너무 아름다워서, 견딜 수 없었다.

by LWB


그것은 너무 아름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어떤 것은 멀리서만 봐야 한다.
닿는 순간, 상처가 되는 빛이 있다.

나는 바라보았다.
천 번도 넘게, 꿈속에서도,

눈을 감아도 그 금빛은 꺼지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아름다웠다.
너무 완전해서, 너무 고요해서,
내 안의 모든 불완전함을 비추었다.


나는 금각 앞에서 더듬거렸고,
숨을 삼켰고, 존재를 버티지 못했다.

그것은 나를 용서하지 않았다.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머리 위로만 빛났다.

그래서 나는 손을 뻗는 대신 성냥을 켰다.

불은 춤췄고, 기와는 타올랐고,
금빛은 꺼지지 않은 채 무너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자유로워졌다.
아무것도 아름답지 않았기에.

나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좋아한다. 무너진 인간들의 속삭임, 말끝마다 스며드는 자조에 익숙했다.

그러다 우연히, ‘미시마 유키오는 다자이를 싫어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피적이고, 자학적이며, 약자성에 기대는 글쓰기”라고 했었나.
'금각사'를 펼쳤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달랐던 걸까. 무엇이 불편했고, 무엇이 맞서고 있었을까.

그렇게 나는 다자이가 쓰지 못했을 문장들과, 다자이가 바라보지 않았던 세계, 그리고 다자이라면 결코 쓰지 않았을 결말을 마주하게 되었다. 결국, 나도 금각에 매료 되었다.


1950년 7월 2일, 일본 교토의 명소 금각사가 불탔다. 범인은 금각사에서 수행 중이던 21세의 견습 승려, 하야시 유키오였다. 그는 새벽녘, 성냥을 켜 금각사 2층과 3층을 불태운 뒤, 근처 산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체포되었다. 그가 왜 불을 질렀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에게 금각사는 경배의 대상인 동시에 압박의 상징이었고, 그 불길은 자기 존재를 억눌렀던 절대적 아름다움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전통과 신성,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금각사가 한 청년에 의해 파괴된 사실은, 미(美)와 광기, 신성과 파괴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실이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금각사'를 썼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사건 재현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에서 절대미와 자기혐오, 구속과 해방이 충돌하며 불꽃을 일으키는 사유의 서사를 만들어냈다.




소설은 2차 세계대전 직전과 종전 직후를 배경으로, 주인공 ‘나’ 미조구치가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언어장애(말더듬이)로 인해 고립감을 느꼈고, 아버지의 이상화된 말 속에서 ‘금각사’를 아름다움의 절대 상징으로 내면에 새겨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교토의 금각사를 관리하는 녹원사에 수습승려로 들어간다. 그러나 실제 금각사는 그가 꿈꿨던 초월적 아름다움과는 달랐고, 이 괴리는 그를 더욱 내면으로 침잠하게 만든다. 학창 시절, 그는 친구 쓰루카와와 친분을 맺으며 잠시나마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경험하지만, 점차 멀어진다.

그는 삶의 여러 장면에서 ‘추한 자신’과 ‘완전한 금각’ 사이의 간극을 절감한다. 한때 연모했던 여학생에게 경멸당한 기억, 유곽에서의 첫 경험, 어머니의 불륜을 암시하는 장면, 가시와기와의 교류 등은 모두 그에게 인간적 열등감과 왜곡된 미의식을 심화시킨다.

특히 가시와기는 자신의 신체적 결함(안짱다리)을 활용해 여성들을 유혹하며, 세상의 아름다움과 타락을 동시에 조롱하는 인물이다. 그는 미조구치에게 철학적 영향을 끼치며 금각사에 대한 집착을 더욱 부채질한다. 가시와기의 소개로 간 부잣집 딸과의 삼각 구도, 하숙집 딸과의 얽힘은 모두 미조구치에게 ‘여성과 금각’의 이중적 이미지를 강화시킨다.

결국 쓰루카와가 자살하고, 가시와기로부터 돈을 빌려 출가까지 하면서 미조구치는 점점 세상과 단절된 채 금각사에 자신의 욕망과 혐오를 투영한다. 사진 사건을 계기로 노사와라는 동료 승려와 갈등을 겪기도 하고, 자신의 내면이 점점 파괴되어간다는 자각에 이른다.

모든 것을 정리하듯, 그는 금각사를 불태우기로 결심한다. 이 아름다움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이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없애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불을 지르려는 순간, 그는 주저한다. 이 결단 앞에서조차 그는 자신을 완전히 해방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결국, 금각사는 실제로 불타오르고, 그는 이 행위로 인해 자신과 금각사의 관계를 비로소 끊어낸다.



미조구치


미조구치는 '금각사'의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어린 시절부터 말더듬이와 병약함으로 인해 열등감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가난한 시골 사찰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금각”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란다. 아버지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그를 교토의 금각사(소설에서는 ‘녹원사’)의 도제로 맡기면서 미조구치는 금각사 승방에서 생활하게 된다. 소설 대부분의 사건은 미조구치의 관점에서 전개되며, 그는 금각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여 내면의 갈등과 외부 세계와의 충돌을 겪다가 결국 금각에 불을 지르는 방화를 저지르게 된다.

그는 작품 전체의 상징 구조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로, 그의 심리는 금각의 절대미와 자신의 추악함 사이의 대립으로 요약된다. 아름다운 것에 매료되지만 동시에 자신이 느끼는 열등감과 소외감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파괴 충동으로 반전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학창 시절 그가 존경하던 해군 사관생도 선배의 상징인 단검에 몰래 흠집을 내는 일화는,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반항심과 악의를 작게나마 표출한 사건이다. 이러한 소심한 반항은 훗날 금각이라는 보다 거대한 대상으로 향하면서 파괴적 성격을 드러낸다. 미조구치에게 금각은 곧 이상화된 아름다움과 권위를 뜻하며, 그는 금각을 동경하면서도 자신이 결코 그 아름다움에 필적할 수 없다는 열패감을 품는다. 작품 속에서 금각의 완벽함은 미조구치로 하여금 스스로를 세속적이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느끼게 하는 거울과 같고, 이러한 성과 속의 간극에서 비롯된 수치와 증오는 그의 행동에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한다.


우이코


그녀는 미조구치의 고향 마을에 살던 이웃 집 소녀로, 미조구치가 처음으로 사랑하고 동경한 대상이다. 미조구치가 숙부 집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이코는 또래보다 성숙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묘사된다. 말더듬이였던 미조구치는 활달하고 도도한 우이코를 멀리서 동경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제대로 다가가지 못한다. 줄거리 속 사건으로 우이코는 탈영병이 된 해군 병사와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지는데, 군 헌병대가 마을을 수색하자 그녀는 연인을 배신하고 그의 은신처를 알려주고 만다. 궁지에 몰린 탈영병 애인은 우이코를 총으로 쏴 죽인 후 스스로도 자결하며, 미조구치는 자신의 눈앞에서 첫사랑의 비극적 죽음을 목격한다. 이렇게 우이코는 소설 1장에 등장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퇴장하는데, 그녀의 죽음은 이후 미조구치의 심리와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의 복선이 된다.

우이코는 작품에서 절대적인 미의 화신으로 상징된다. 미조구치에게 우이코는 현실 속 소녀라기보다 멀리서 바라보는 관능적 아름다움의 환상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미조구치의 성적 상상력과 이상화된 여성성을 지배했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운 아름다움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우이코가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은 미조구치에게 커다란 수치와 충격이었다. 특히 그녀가 죽기 직전 보여준 비열한 배신 행위는, 오히려 미조구치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는데, 이는 우이코마저 결국 성에서 속으로 떨어져 자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때 범접할 수 없는 절대 미였던 우이코가 나약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자, 미조구치는 “마침내 그녀는 나까지도 포용한 것”이라 느끼며 성과 속의 간극이 좁혀지는 경험을 한다. 작품 내에서 우이코의 기능은 이렇게 미조구치의 이상향에 금이 가는 순간을 제공함과 동시에, 이후 그의 미적 집착이 금각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된다는 데 있다. 실제로 우이코의 죽음 뒤 미조구치는 금각을 직접 보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그것을 환상의 미로 승격시키며, 우이코를 대신할 절대적 존재로 금각을 신격화한다.

실제 소설에서 우이코와 금각은 직접 마주치는 법이 없는데, 이는 곧 두 존재가 동일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다시 말해, 우이코의 부재가 금각에 대한 집착으로 전환되면서, 미조구치에게 금각은 곧 우이코의 영원한 대체물이 된 것이다.그녀는 미조구치의 성욕과 이상화된 미적 욕망을 최초로 자극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통해 그 욕망에 파괴의 그림자를 드리운 장본인이다. 우이코의 아름다움이 죽음으로 정점에 달했듯이, 미조구치는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죽음과 미에 대한 강박을 갖게 되고, 이는 금각을 태우는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초반부 잠깐 등장하지만 서사 전반에 걸쳐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이다. 그녀의 죽음은 미조구치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주인공의 정신 세계를 결정적으로 뒤흔든 사건이며, 금각 방화의 정신적 복선 역할을 한다고 해석된다.


쓰루카와


미조구치가 금각사의 승려 도제로 들어간 후 처음으로 사귄 또래 친구로, 작품에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면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며 밝고 선량한 성격의 청년으로, 말더듬이로 위축되어 있던 미조구치에게 처음으로 진심 어린 우정을 보여준 인물이다. 미조구치는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평범한 청춘의 일상과 평화를 경험하고, 자신의 어둡고 죄 많은 내면이 쓰루카와의 선의로 정화되는 듯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전쟁 후의 혼란 속에서 쓰루카와는 뜻밖의 죽음을 맞이한다. 처음에는 교통사고로 알려지지만, 나중에 연애 문제로 인한 자살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의 유서는 미조구치로 하여금 친구의 숨겨진 고통과 어두움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된다.

쓰루카와는 미조구치의 양심과 순수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결점이 거의 없는 인격자로 그려지며, 미조구치가 세속적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도덕적 지주 역할을 한다. 미조구치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의 더럽고 죄 많은 모습도 선한 쪽으로 해석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표현할 정도로 의지한다. 그는 미조구치 내면의 선과 이상을 구현한 인물로, 금각, 아버지, 초자아와 같은 상징들과 연결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쓰루카와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이상이 좌절되는 순간을 상징한다. 미조구치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도덕성과 아름다움이 허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것은 결국 그가 구원의 가능성을 포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쓰루카와의 자살이라는 반전은, 순수와 선의 상징 같았던 인물도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인간 내면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이로써 그는 미조구치에게 마지막 남은 이상이자, 동시에 그것이 깨져버리는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서사 구조에서 쓰루카와는 미조구치의 궤적과 대조되는 삶을 보여주는 장치다. 그는 미조구치에게 삶의 선한 선택지를 상징했으며, 그의 상실은 미조구치 인생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또한 쓰루카와와 가시와기를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인간 정신의 양면성, 즉 도덕과 타락,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부각시킨다. 쓰루카와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비극이 억제되지만, 그가 사라지자 곧 파국이 가속화되는 전개는, 이 인물이 윤리적 균형을 유지하는 축이었음을 드러낸다.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과 충격을 동시에 안기며, 미조구치의 범죄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와 감정 이입을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가시와기


가시와기는 미조구치가 전후 교토의 오타니 대학에 진학한 뒤 사귄 동급생 친구로, 발을 저는 장애를 지닌 청년이다. 가난한 가정 출신이며 신체적 콤플렉스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언변과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며 교활한 성격을 갖고 있고, 특히 여성을 유혹하고 조종하는 데 능하다. 자신의 불구를 동정심을 자극하는 무기로 삼아 여성의 마음을 얻는 방식은, 정반대 성향을 지닌 미조구치와 확연히 대조된다. 대학 입학 초기 미조구치는 여전히 쓰루카와와 가까웠으나, 곧 가시와기의 독특한 매력과 냉소적인 세계관에 이끌려 가까워진다. 이후 그는 가시와기와 어울려 수업을 빠지고 소풍을 가거나, 여성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등 쾌락과 죄의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이러한 체험은 미조구치에게 세속적 쾌락과 더불어 죄의식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철저히 이해타산적이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 후반에 이르면 금전 문제로 갈등을 빚거나, 쓰루카와의 편지를 빌미로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등의 긴장감이 형성된다.

또한 이야기 속에서 악과 추함의 화신으로 작용한다. 그는 신체적 장애라는 추함을 현실적으로 지니고 있으며, 도덕이나 관념보다 본능적 욕망과 지적 회의를 좇는 인물이다. 이 점에서 그는 미조구치의 어두운 내면을 대변하는 또 다른 자아와 같다. 쓰루카와가 양심이라면 가시와기는 욕망과 파괴 충동의 화신이다. 실제로 미조구치는 가시와기와 어울리며 자신의 부정적 감정이 정당화되는 신선한 감각을 느낀다. 가시와기는 미조구치의 죄의식을 미화하며, 자기파멸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가시와기의 냉소는 미조구치에게 금각과 아름다움이라는 이상이 실은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파괴의 정당화로 이어지는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가시와기는 위악에 머무르는 인물로, 모든 악덕과 철학은 말로만 존재한다. 반면 미조구치는 그 말들을 실천으로 옮긴다. 이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구조와 유사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한 이는 하이드가 아니라 지킬, 곧 미조구치 자신이었다. 이로써 작가는 유혹의 책임보다도 유혹에 넘어간 자의 비극을 강조한다. 가시와기는 끝까지 행동하지 않고, 미조구치에게 온갖 자기합리화의 언어를 제공하지만, 방화를 저지른 이후 미조구치는 결국 혼자가 된다.

서사 구조에서 가시와기는 쓰루카와와 대조적인 인물로 배치된다. 쓰루카와가 죽은 이후 가시와기가 본격적으로 미조구치 곁을 차지하게 되는 전개는, 미조구치 내면에서 선이 사라지고 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미조구치의 어머니


미조구치의 어머니는 시골 사찰의 주지였던 남편이 병약해진 후, 아들의 장래를 위해 금각사의 다야마 도센에게 아들을 맡기는 선택을 한 인물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사실상 보호자가 된 그녀는, 미조구치가 금각사에 들어간 이후 서사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배경 속에서 현실적인 삶의 무게를 보여주는 존재로 남는다. 후반부에서는 미조구치가 문제를 일으켜 금각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 그와 함께 주지를 찾아가 용서를 빌며 다시 복귀시켜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어머니가 비록 감정 표현은 서툴지언정 아들에 대한 책임감을 놓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어머니는 현실적이고 속된 삶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된다. 미조구치가 아버지를 아름다움과 이상, 미의 상징으로 여겼던 반면, 어머니는 생존과 생활의 상징이었다. 미조구치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 초라한 얼굴과 화장기 없는 외모, 육감적인 생물의 냄새를 느꼈다고 회상하며, 그런 점에서 어머니는 금각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존재로 인식된다. 이처럼 어머니는 금각이라는 성스러운 세계와 날카롭게 대비되며, 미조구치 내면에서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자극하는 인물로 작용한다. 그녀는 아들을 물질적으로 부양하긴 하지만, 그의 내면적 고통이나 정신적 세계에는 관심이 없다. 이는 미조구치에게 정서적 고립감을 안겨주며, 결국 그가 이상에 집착하게 되는 심리적 기반을 형성한다. 그녀의 모성은 따뜻하기보다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차원에 머무르며, 이는 미조구치가 어머니에게서 위안을 얻지 못하고 더욱 도센이나 금각과 같은 이상적 세계에 몰입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미조구치의 어머니는 서사 구조상 현실과 이상이라는 중심 갈등 구도에서 현실 쪽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금각사라는 성스러운 세계와 직접적인 연결이 없는 인물이지만, 그로부터 추락한 후에도 남아 있는 세계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미조구치가 금각을 불태운 후에도 인생은 이어지며, 그때 그에게 남아 있는 연결고리는 결국 어머니와 같은 현실적 존재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금각이 사라진 뒤에도 소멸하지 않는 현실의 상징으로, 작품의 결말에 어두운 여운과 함께 묵직한 무게감을 부여한다.


다야마 도센


다야마 도센은 금각사의 주지로, 미조구치 아버지의 옛 친구이자 미조구치를 금각사에 받아들인 인물이다. 미조구치가 금각사에 들어온 이후 학업과 수행 전반을 돌보는 보호자 역할을 하며, 대학 진학의 기회를 마련해 줄 정도로 후견인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초기에는 인자하고 안정적인 권위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위선적인 실체가 드러난다. 그는 금각사의 체면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불미스러운 사건을 은폐하고, 전후 사회의 타락 속에서 점차 세속적 쾌락에 물든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술 취한 미군 병사와 일본인 창녀가 금각사에 난입해 소동을 벌인 사건에서 도센은 폭력에 연루된 미조구치를 감싸기 위해 돈으로 일을 무마한다. 또한 뒷부분에서는 그 자신이 창녀와 어울려 유흥을 즐기는 장면도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을 목격한 미조구치는 충격과 환멸을 느끼며, 결국 도센의 부정을 일부러 폭로해 자신이 금각사에서 추방당하도록 만든다.

도센은 권위와 제도 종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금각사의 아름다움과 전통을 수호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후 시대의 타락과 기만을 체현한다. 미조구치에게 도센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인물로, 믿음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위선과 타락은 금각사 자체에 대한 신뢰를 흔들며, 미조구치에게 금각의 아름다움이 결국 허상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준다. 또한 도센은 아버지의 권위를 대신한 인물이기에, 그의 몰락은 미조구치에게 부친의 이상까지 부정당한 듯한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는 금각사의 성스러움이 사실은 위선과 허위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인물이자, 미조구치가 금각을 불태우는 결정을 내리는 데 핵심적인 계기가 된다.


해군 사관생도 선배


미조구치가 고향을 떠나 숙부 집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잠깐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는 미조구치의 중학교 선배로, 해군 기관학교에 진학한 엘리트 장교 후보생이자 지역 사회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전시 일본에서 군복을 입고 귀향한 그는 마을 사람들의 자랑이자 젊은 영웅처럼 여겨졌고, 어린 미조구치도 겉으로는 그를 존경하는 듯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묘한 적대감과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상징적인 일화가, 미조구치가 선배의 명예를 상징하는 단검에 몰래 흠집을 낸 사건이다. 그는 선배의 방심을 틈타 단검에 아주 작은 손상을 가했으나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사건은 조용히 지나간다. 이 일화는 서사에서 직접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지만, 미조구치 내면에 잠재된 반항심과 파괴 본능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서로 기능한다.

건강하고 단정하며 장래가 유망한 이 선배는, 병약하고 말더듬는 자신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기에 미조구치에게는 열등감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단검을 훼손한 행위는 표면적으로는 하찮고 유치한 장난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자기 무력감에 대한 보상 행위였다. 이는 미조구치의 내면에서 처음으로 파괴 충동이 드러난 상징적인 순간이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피해도 없지만, 이 작은 흠집은 훗날 금각이라는 숭고한 존재를 파괴하는 범죄로 이어지는 전조로 해석될 수 있다.


젊은 과부


젊은 과부는 이름 없이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작품 중반 두 차례에 걸쳐 미조구치의 기억과 현실 속에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처음 그녀는 전쟁 말기 난젠지 근처에서 출정하는 애인과 이별을 나누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미조구치는 쓰루카와와 함께 산책을 하다가 그녀를 멀리서 목격한다. 그녀는 젖을 짜 넣은 찻잔의 차를 연인에게 건네며 이별을 준비하는데, 이 장면은 미조구치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이후 전쟁이 끝난 후, 가시와기의 소개로 다시 나타난 그녀는 꽃꽂이 선생이 되어 있으며, 이미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상태다. 가시와기는 그녀와 친분을 쌓은 뒤 미조구치에게 소개하고, 미조구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녀는 미조구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육체적 관계를 시도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미조구치는 금각의 환영에 사로잡혀 극도의 불안감 속에 도망치듯 그녀의 집을 떠난다.

그녀는 작품 속에서 관능과 상실, 현실적 욕망의 복합적 상징으로 등장한다. 모유의 차를 건네는 장면은 성과 모성, 숭고함과 속됨이 교차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생명과 사랑, 헌신의 절정을 상징한다. 그녀는 이후 현실 속 여인으로 다시 등장하지만, 여전히 미조구치의 기억 속에서는 그 상징적인 순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녀는 미조구치가 이상 대신 현실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지만, 그는 끝내 이마저도 거부한다. 젊은 과부는 살아 있는 현실의 아름다움이자, 동시에 이상과 환상의 유령 같은 존재로 겹쳐진다. 미조구치는 그녀를 우이코의 환영과 겹쳐 보았을 가능성이 높고, 이는 곧 현실 여성과의 접촉이 금각의 환상에 의해 파괴되는 구조를 강화한다. 그녀는 미조구치가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고 금각이라는 이상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서사적으로 젊은 과부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이며, 미조구치의 내면 갈등을 극대화하는 장치다. 젊은 과부는 미조구치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현실의 유혹이자 기회였지만, 결국 그것조차 소멸함으로써 금각 방화의 감정적 동기를 완성하게 만든다.


그녀와 함께 있던 사관


이 인물은 젊은 과부가 과거에 사랑했던 해군 사관 생도 혹은 장교로, 작품 내에서 짧은 순간 등장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미조구치가 목격한 모유의 차 장면 속에서 과부와 함께 있었던 남성으로, 곧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이었다. 작중 이후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지만, 그가 무사히 돌아오지 못해 여인이 과부가 되었다는 점에서 전쟁의 희생자임이 암시된다. 그의 존재는 직접적인 대사나 행동 없이도, 젊은 과부의 과거와 미조구치의 기억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사관은 미조구치에게 이상화된 연인의 상징으로 비쳐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연인의 헌신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침묵 속의 로맨스를 구현하며, 미조구치의 기억 속에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인물로 각인된다. 이는 우이코가 사랑했던 탈영병과 대조되며, 우이코의 연인이 폭력과 겁에 질린 존재였다면, 이 사관은 조용하고 수용적인 태도로 오히려 아름다움의 이미지로 남는다. 모유가 담긴 차를 나누는 장면은 사랑이 숭고하게 승화된 순간으로, 사관은 그 속에서 감정과 신념이 공존하는 인물로 작동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전쟁의 희생자이며, 살아 있는 사람들을 현실의 고통 속에 남겨두고 떠난 이상화된 유령이다.

사관은 전쟁이 만들어낸 특수한 아름다움의 형상이며, 미조구치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환상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미조구치가 과부를 만났을 때, 자신이 이 사관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 같은 무의식적 압박이나 죄책감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이로 인해 현실의 여성과의 관계는 더욱 실패로 귀결되고, 미조구치에게는 과거에 목격한 ‘사관과 과부’의 장면이 금각과 같은 미화된 기억으로 변형되어 자리 잡는다. 결국 그는 과부와 함께하지 못하며, 이 사관의 유령은 미조구치의 삶을 조용히 방해하는 그림자처럼 남는다.

이 인물은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젊은 과부와 연결되어 미조구치의 심리와 금각 방화라는 극단적 결정을 뒷받침하는 배경의 일부가 된다. 그가 보여준 숭고함, 고요한 결연, 이별의 장면은 미조구치의 기억 속에 미화된 이상으로 남았고, 그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은 결국 거부되고 파괴된다.


하숙집 딸


하숙집 딸은 가시와기가 전후 얹혀 살던 하숙집의 어린 딸로, 미조구치와는 또래의 평범한 젊은 여성이다. 작품에서는 비교적 짧게 등장하지만, 미조구치의 성적 각성과 그 좌절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에서 나타난다. 어느 봄날, 가시와기는 미조구치와 함께 학교를 빠지고 아라시야마로 소풍을 가는데, 이때 그를 흠모하는 부잣집 아가씨와 하숙집 딸이 동행한다. 소풍 도중 미조구치는 하숙집 딸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은근한 호감과 풋풋한 설렘이 싹튼다. 감정의 흐름에 이끌린 미조구치는 조심스레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대며 친밀감을 시도하지만, 그 순간 금각의 환영이 떠올라 갑작스런 불안과 자기혐오에 휩싸인다. 그는 결국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상황은 어색하게 끝난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 일 없이 끝나며,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에서 퇴장한다.

그녀는 일상적인 연애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우이코나 젊은 과부처럼 극적인 사연이나 상징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고 순진한 처녀로 그려진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는 미조구치에게 현실이 제시한 작고 소박한 행복의 기회였다. 만약 미조구치가 금각의 강박에서 벗어나 그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면, 그는 평범하지만 안정된 삶의 한 조각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조구치는 그런 기회조차 무너뜨린다. 그는 아무 금기도, 비극적 배경도 없는 상황에서도 실패하며, 그것이 외부 탓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문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맑고 순수한 매력은 오히려 우이코의 환영과 겹쳐 보였을 가능성도 있으며, 이는 그가 현실 여성과의 관계를 맺는 데서조차 과거의 망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숙집 딸은 결과적으로 미조구치의 성적 무능감과 자기혐오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서사 구조상 하숙집 딸의 에피소드는 짧고 단순해 보이지만, 미조구치의 상태를 중간 점검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미조구치가 정상적인 인간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하숙집 딸은 작품 속 여성 인물들 가운데 가장 평범한 인물로, 그와의 실패는 주인공이 이미 구원의 가능성을 상실했음을 암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결과적으로 하숙집 딸과의 실패는 작품 전체의 운명론적 분위기를 강화하고, 미조구치가 결국 금각을 불태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미군 병사와 유산한 창녀


미군 병사와 창녀의 사건은 일본 패전 직후, 금각사 경내에서 벌어진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다. 전후, 금각사를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던 시기, 술에 취한 미군 병사가 임신한 일본인 여성을 데리고 금각사를 찾는다. 미조구치는 사찰 견학을 안내하던 중 그들을 맞이하지만, 곧 두 사람은 격하게 다투기 시작한다. 분노한 미군은 여성을 거칠게 밀쳐 넘어뜨리고, 총으로 미조구치를 위협하며 “저 여자를 짓밟으라”고 명령한다. 공포에 질린 미조구치는 명령에 따라 그녀의 배 위를 발로 밟고 만다. 미군은 만족한 듯 담배 두 보루를 던져주고 자리를 떠난다. 미조구치는 그 담배를 도센 주지에게 바치며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 그러나 며칠 뒤, 그 여성은 금각사를 다시 찾아와 자신이 유산했고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보상을 요구한다. 도센은 돈을 건네 그녀를 돌려보내고, 사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용히 덮인다. 그녀는 이름 없이 창녀로만 불리지만, 그녀의 호소는 미조구치에게 깊은 죄책감과 흔들리는 정체성을 남긴다.

심리적으로 이 사건은 미조구치의 내면을 결정적으로 어둡게 만든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해소하지도 못하고 마음속에 묻어둔다. 이는 그의 정신을 더욱 병들게 하고,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게 만들며, 결국 금각사 방화라는 자기 파괴적 결단의 밑바탕이 된다. 깊이 보면, 여인을 짓밟은 행위는 단순히 강요된 행동이 아니라, 그가 내면 깊이 품고 있던 욕망과 혐오가 표출된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여성, 성, 생명에 대해 갈망하면서도 증오하고 있었으며, 이 모순이 일으킨 파열이 바로 이 사건이었다. 이후 그가 느낀 죄책감은 스스로를 벌하고자 하는 심리와 맞물리며, 금각을 불태우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심리적 연료가 된다.


마리코


마리코는 작품 후반부에 등장하는 유곽의 여성, 곧 창녀이다. 미조구치는 금각사 방화를 결심하기 전, 마지막으로 스스로 타락해보려는 의지 속에 유곽을 찾아간다. 그는 도센 주지로부터 받은 등록금과 생활비를 탕진하고,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금각사에서 추방당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찾은 유곽에서 미조구치는 마리코와 만나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놀랍게도 이 순간, 그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금각의 환영은 나타나지 않는다. 미조구치는 처음으로 강박 없이 성적 경험을 하게 되고, 거기서 큰 충격과 동시에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금각사에서 추방되지 못한 현실을 확인하고, 결국 스스로 불태우는 결단을 내린다. 마리코와의 만남은 매우 짧지만, 미조구치에게 결정적인 감정의 전환점을 제공한다.

관념과 이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순수한 육체의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비극적 서사나 미화된 배경 없이 등장하며, 직업적 창녀로서 상업화된 관능을 체현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미조구치는 그녀를 어떤 과거 기억이나 이상화된 환영 없이 순수한 현재의 쾌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는 마리코가 정신적 강박의 굴레를 벗어나는 유일한 통로였음을 뜻하며, 그녀는 그에게 단 한 번 현실과 육체의 해방을 선사한다. 마리코는 사회적으로 하찮은 인물이지만, 미조구치에게는 구원의 손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험은 그에게 육체가 정신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이 그동안 추구했던 이상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공허를 일깨운다. 그는 현실 속 구원조차 끝내 붙잡지 못하고, 이미 선택해버린 파멸의 길을 되돌릴 수 없다고 느낀다.




남전묘참, 조주, 금각사, 미조구치.


남전 선사가 고양이를 둘러싼 승려들의 말다툼을 보고, 고양이를 베어 죽였다는 고승담이 나온다. 그는 말한다. “누군가 한마디라도 옳은 말을 했더라면 고양이는 살았을 것이다.”

여기서 남전의 행위는 ‘무언의 진리를 말하지 못한 자들’을 향한 가차 없는 응징이며, 동시에 언어로 가닿을 수 없는 ‘도’의 부재에 대한 폭력적 응답이다.

남전의 이 일화를 들은 조주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간다. 그 침묵은 “말로 하는 응답”의 부정이자, 도에 대한 보다 심원한 침묵의 깨달음이다. 남전의 검보다 깊고 고요한 반폭력적 대답으로 그래서 남전은 말한다.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미조구치는 ‘아름다움’이라는 절대적 가치 앞에서 말문을 잃은 자다. 금각은 그에게 우이코의 환영이자, 신성의 형상이며, 침묵하는 신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결국 그것을 베고 만다. 아니, 불태운다는 행위로 응답한다. 말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강박이 남전의 칼날처럼 작동한 것이다.


조주는 침묵함으로써 구원한다. 그는 ‘행동의 언어’를 통해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다.

미조구치는 침묵함으로써 파괴한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이상 앞에서 무너졌고, 그 무너짐은 결국 방화라는 언어로 터진다. 금각은 고양이였고, 미조구치는 남전이었다.


'금각사'는 '아름다움이라는 고양이’를 두고 벌어진 침묵과 파괴의 선문답이다. 그 앞에서 미조구치는 말을 잃고, 손에 불을 쥔다. 당신이 바라보던 금각의 빛은, 고양이의 부드러운 숨결과도 같았다. 누군가는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조주는 없었다.

그러므로 금각은 불탔고, 고양이는 베였으며, 조주의 신발은 아직도 바깥을 향해 놓여 있다.


주지 스님의 기묘한 자세.


미조구치가 금각사 방화를 결심한 뒤, 그는 사찰의 주지가 예상치 못한 웅크린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주지는 마치 몸을 움츠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이는 스님 세계에서 “니와즈메”라 불리는 특이한 자세와 흡사하다.


책에는,

“니와즈메”라는 자세였다. 그것은 승당 입중의 청원을 거부당한 떠돌이 신참 승려가 온종일 절의 대문 앞에서 짐 보따리에 머리를 숙인 채 버티며 지내면서 취하는 수행 자세와 비슷했다. 만일 노사와 같은 고승이 그런 신참 행각승의 수행 방식을 흉내내고 있다면, 그 겸허함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처럼 주지는 자신의 몸을 움츠려 땅에 낮춤으로써 마치 짐승처럼 보일 정도의 낮은 웅크림 상태에 있었다. 미조구치는 처음에 주지가 병이 났거나 크게 약해진 것인가 의아해하지만, 곧 이것이 단순한 탈진이 아닌 의도적 자세임을 깨닫게 된다.

주지가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는 니와즈메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조구치에게 강렬한 상징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금각의 아름다움과 권위를 대표하던 인물이 한순간에 비천한 부처자세로 전락한 모습은, 미조구치로 하여금 아름다움과 권위에 대한 환멸을 더욱 확고히 느끼게 한다.

미조구치는 한편으로는 주지의 놀랄 만큼 겸허한 태도에 연민과 동요를 느끼면서도, 곧 “분명히 이건 나를 위해 보여주는 행동이다!”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노사가 자신을 일부러 낮춤으로써 미조구치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것임을 간파한 것으로, 실제 소설에서 미조구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분명히 날 보라고 한 거다! ... 나를 조용히 찢어발겨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마침내 나를 굴복시키는 이러한 풍자적인 훈계 방법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지는 마지막 수단으로 제자에게 스스로를 낮춰 보이는 역설적 가르침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선종에서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위해 기상천외한 방편을 쓰는 것과도 닮았다. 평소 권위로 제자를 제어하던 스승이 오히려 자신을 낮춤으로써 제자의 자각을 이끌려 한 것이다.

선불교 또는 무도에서 전해지는 활인검의 개념처럼, 상대를 직접 해치지 않고도 자신을 낮추고 정신적으로 충격을 주어 상대를 깨우치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주지는 말 없이 자신의 몸짓으로 미조구치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잠시나마 미조구치는 주지에 대한 연민과 존경심마저 느끼려는 기색을 보인다. 이는 사제 관계의 극적인 역전으로, 높은 이는 낮아지고 낮은 이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상황에서, 평소 스승을 경외하던 제자가 오히려 스승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비와 겸허의 몸짓은 미조구치의 마음에 긍정적 변화를 끌어내기는커녕, 결국 그의 반발심을 자극하고 만다. 미조구치는 “노사가 결국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이런 방법으로 날 꺾으려 드는구나” 하고 깨달은 순간, 오히려 정신을 차려 연민에 굴복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엄습하던 감동을 떨쳐내며, “모든 것이 역전되었다. 나는 이전보다 더욱 확고한 마음을 손에 넣었다”고 선언한다. 주지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미조구치는 그것을 자신을 향한 계략으로 받아들이고 분노 섞인 결의로 맞섰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지의 겸허한 자세는 미조구치에게 마지막 결정적 각성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방향은 주지가 바라던 것과 정반대였다.

이 니와즈메 자세 사건은 작품의 철학적 클라이맥스로서, 미조구치의 내면에서 악행을 향한 최종 결단이 이루어지는 계기이다. 주지의 모습을 본 직후 미조구치는 “이제 더 이상 주지가 나를 쫓아내주길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내 의지로 방화를 결행하기로 결심했다”고 다짐한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는 별개의 세계의 사람이 되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미조구치는 비로소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느낍니다. 이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한 순간의 깨달음을 뒤틀린 형태로나마 연상시키는데, 그 내용은 절대적인 '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괴를 선택하는 각성이다.

미조구치는 금각이라는 궁극의 미를 파괴함으로써 자기 삶의 굴레를 끊고자 했다. 그의 눈에 금각은 자신을 옭아맨 아름다움의 족쇄이자, 세상 부조리의 상징이었다. 선불교 사상에서는 때때로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파격적 표현으로 집착의 대상을 타파할 것을 말하곤 한다.

미조구치에게 금각은 일종의 세속적 '부처'였고, 그는 그것을 불태움으로써 자기 존재를 옭아맨 미의 환상을 죽이려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지의 니와즈메 자세는, 미조구치에게 집착에서 벗어날 마지막 기회처럼 제시되었다. 아름다움과 권위도 결국 이렇게 무력하고 덧없는 것임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굳이 악에 손을 대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암시였을 수 있다. 이는 주지가 미조구치에게 건넨 최후의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조구치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보다 거부함으로써 자기 길을 택한다. 주지의 겸허한 자기희생을 그는 “본래 자기 것이 아닌 악행과 죄업을 짐승 같은 자세로 드러내 보이며 겸허해진” 행위로 풀이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악과 죄를 짊어지기로 한 것이다. 이는 선불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허무와 파괴를 통한 자기 해방의 길로 치닫는 모습이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 소식을 들은 미조구치는 “세계가 몰락하고 있다”는 예감을 확신하며, 더 이상 망설임 없이 금각사에 불을 지르기로 한다.

결국 미조구치는 연민을 끊어냄으로써 자유를 얻었다고 느끼지만, 그 자유는 파괴적인 행위로 표출된다. 이는 마치 선사가 제자를 깨우치기 위해 던진 화두를 제자가 정면으로 거부하고 독자적(또는 파계적) 깨달음을 얻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선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진정한 깨달음은 자비심과 무집착에 있다 할 텐데, 미조구치는 자비를 뿌리치고 악을 택함으로써 세속적 의미의 자기 해방을 이룬 셈이다. 주지의 웅크린 자세는 이러한 아이러니 '겸허의 가르침이 파괴로 귀결되는 역설'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젠카이 스님과의 문답.


이 장면은 소설의 절정 직전에 펼쳐진다. 미조구치는 이미 금각사를 불태우기로 결심하고 실행을 준비한 상태다. 그런 밤에 후쿠이 현의 용법사 주지인 젠카이 스님이 금각사를 찾아온다. 젠카이는 도센과 미조구치 부친의 오랜 친구로,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은 인물로 묘사된다. 미조구치는 이 방문 승려 젠카이를 존경하며, 그의 솔직하고 단순한 인품에서 어떤 깨달음이나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대화를 통해 미조구치는 일시적이나마 내면에 변화를 겪는다. 젠카이 스님의 꾸밈없는 정직함과 진실성은 미조구치의 혼란스런 마음에 신선한 충격과 활력을 준다. 그는 스님의 솔직한 통찰에서 이해받고자 하는 갈망을 느끼고, 자신의 내적 고민을 털어놓고 해결받고 싶어한다. 실제로 미조구치는 젠카이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불안과 열망을 어느 정도 드러내며, 젠카이의 반응을 통해 스스로를 객관화해보는 순간을 맞는다. 이는 그에게 잠깐의 맑은 정신과 통찰을 허락하여, 자신이 저지르려는 행위의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요컨대 젠카이의 강직하고도 단순한 세계관은 미조구치로 하여금 자신의 나약함과 집착의 부질없음을 직면하게 함으로써, 그의 결심을 한때 망설이게 하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방화를 실행하기 직전 미조구치는 금각사의 아름다움을 마지막으로 마주하며 한 차례 주저한다. 어릴 적부터 품었던 황홀한 환상이 되살아나 망설이게 된 것이다. 이 내적 동요에는 젠카이와 나눈 대화의 영향, 곧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의미의 무상함에 대한 자각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조구치는 금각사를 파괴함으로써 스스로 해방되려는 의도와, 한편으로는 그 아름다움마저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지막 희미한 희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젠카이의 조언은 미조구치 내면에 의심과 자기성찰의 그림자를 드리워, 그의 계획을 잠시 흔들리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미조구치는 끝내 파괴의 결단을 굽히지 않는다. 젠카이 스님은 미조구치에게 진실한 이해자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지만, 결국 미조구치의 심연을 완전히 읽지는 못한 채 대화는 끝난다. 미조구치는 간절한 심정으로 스님에게 자신을 알아주길 바랐으나, 젠카이의 단순명쾌한 충고는 미조구치의 복잡하고 어두운 내면 고뇌를 완전히 해소해주진 못했다. 이로써 미조구치는 완전한 공감이나 구원의 실패를 확인하고, 자신의 숙명을 스스로 감당하기로 마음 굳히게 된다. 젠카이와의 대화는 그의 정신에 한 줄기 빛을 비췄지만, 그 빛이 닿지 못한 그늘 속에서 미조구치는 여전히 고독한 결행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 결과 미조구치는 금각사에 불을 지르는 파괴 행위로 나아가게 되고, 이는 곧 소설의 비극적 하이라이트로 이어진다.

미조구치의 방화 결심은 겉보기엔 남전의 행위처럼 대상을 파괴하여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금각사라는 '아름다움의 고양이’를 죽여 없앰으로써 스스로 해탈을 얻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선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어리석은 집착의 발로다. 진정한 해탈은 외부 대상을 없앤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집착을 비워냄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젠카이 스님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의 전환이다. 대상을 그대로 두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그는 미조구치에게 행동이 아닌 깨달음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미조구치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행동을 통한 해탈을 택한 셈이다.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절대미에 대한 ‘소유 불가능성’의 자각에서 오는 파괴.
금각은 미조구치에게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금각 앞에서 늘 주눅 들었고, 자신이 추한 존재라는 자의식 속에서 금각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혐오를 일깨우는 폭력적인 상징이 되었다. 그는 그것을 감상할 수도, 소유할 수도, 다가갈 수도 없었기에, 유일한 해방의 방식은 그것을 없애는 것뿐이라고 믿게 된다.

금각과 우이코는 이상화된 아름다움의 ‘유령’이다.
금각은 죽은 우이코의 대체물이자, 미조구치가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의 총체이다. 그는 현실의 여성들과 마주할 때마다, 그녀들 속에서 우이코의 환영을 보았고, 결국 현실 여성과의 관계를 모두 실패하게 된다. 금각은 더 이상 건축물이 아닌, 자신을 지배하는 망령이며, 정신적 강박의 실체였다. 이를 없애야만, 그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발 딛고 설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

파괴를 통한 주체성 회복.
금각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며, 도센 주지를 비롯한 제도적 권위와 미의 규범이기도 하다. 미조구치는 이 금각 앞에서 늘 타인의 시선과 기준에 의해 살아가는 객체였다. 하지만 금각을 불태운 순간,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동한 주체가 된다. 금각의 불꽃은 자아가 처음으로 주체로 솟아오른 상징이다.

이상과 현실의 화해가 아닌 단절.

쓰루카와와 하숙집 딸, 마리코는 모두 현실에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미조구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마다 실패했다. 그는 결국 현실과 화해하는 대신, 이상을 파괴하고 현실에 ‘버려지는’ 쪽을 택한다. 이때 ‘불태움’은 어떤 성장이 아니라 파멸적 선택, 다시 말해 타락한 이상과 절연하는 비극적 의식이다.

미는 영원하지 않으며, 때로 인간을 병들게 한다
금각은 아름다움의 결정체였지만, 그 아름다움은 미조구치에게 병이며 감옥이었다. 미시마는 이 소설을 통해 “아름다움은 구원인가, 속박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미를 간직하는 것보다, 파괴함으로써 진실해질 수 있다”는 탐미주의의 역설을 보여준다.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는 미조구치가 자신을 억압하던 절대미의 망령, 이상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그것은 자아의 파괴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회복을 향한 역설적 행위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잔혹하게 파괴된다”는 미시마의 냉정한 진실을 드러내는 선언이다.


불태운 그 다음의 삶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는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하여, 결말에서는 현실과 다른 선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미조구치는 550년 역사의 금각사를 불태운 직후 자살을 포기하고 살아남기로 결심한다이다.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뒷산에 올라 불타는 금각사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살아야지”라고 다짐하는 모습을 보인다이다. 이와 같이 미조구치는 방화를 통해 오히려 삶의 의지를 회복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작품은 그가 범행 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내포한 채 막을 내린다이다.

서사적으로 '금각사'의 결말은 열린 형태로 남아 있다. 미조구치가 체포되거나 처벌받는 후일담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고, 우리는 불타는 금각사를 등지고 미지의 외부 세계로 나아가는 그의 뒷모습만을 상상하게 된다.

선불교적 관점에서는 그의 금각 방화가 집착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한 극단적 수행으로 읽힌다. 소설 내에 인용된 임제 선사의 가르침은 어떠한 존재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참된 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며, 미조구치는 금각 앞에서 고통받은 자신을 위해 금각을 깨뜨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 남전선사와 고양이 일화와 같은 불교적 일화 역시 미적 집착의 파괴를 암시하며, 그에게 금각의 파괴를 통한 해방이 유일한 구원임을 합리화해 주는 역할을 한다. 결국 미조구치는 금각을 불태움으로써 절대미에 얽매인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의식적 행위에 나선 것이며, 그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속박을 끊고 새로이 주체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말더듬과 외모 콤플렉스로 인한 소외와 열등감이 그의 내면에 깊은 상처로 남았으며, '절대 미'인 금각과 자신의 보잘것없음 사이의 정서적 갈등은 점차 병리적 집착과 공격성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미조구치가 해방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예, 그러나…”라는 단서가 붙으며, 그의 해방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파괴를 통한 자기해방임과 동시에 범죄의 결과로 영원히 남을 그림자를 동반한 운명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복합적인 모습은 미시마 유키오가 우리로 하여금 인간 내면의 모순과 예술의 한계를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니며, 미조구치의 삶이 열려 있는 문제로 남아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왜 나도 금각에 매료되었는가.

아름다움은 때로 너무 완전해서, 현실과 공존할 수 없다. '금각사'에서 금각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결핍을 드러내는 거울이자, 침묵하는 신성이다. 금빛은 눈부시게 빛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높이에 머무르며, 존재의 불완전함을 더욱 선명히 비춘다.

그 아름다움은 감상자를 배제한다. 경배할 수는 있어도, 소유할 수는 없다. 금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였고, 현실 속의 존재들을 모욕하는 이상이었다. 완전한 것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것은, 오히려 침묵 속에서 감상자를 꾸짖는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불을 붙인다. 닿을 수 없기에, 오히려 없애야만 했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는 무해하지만, 그것에 붙들린 인간은 병들 수 있다. 완전함은 불완전한 자를 파괴한다.

그러나 나는 미조구치처럼 금각에 상처받은 것이 아니다. 나에게 금각은 우이코의 대체물도, 과거의 상처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동경해 마지않는 절대적 형상이었고, 실현 불가능한 완전함의 상징이었다. 미조구치가 무너진 인간이라면, 나는 무너질 수 없기에 금각에 끌렸다. 그는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해방되었지만, 나는 그것을 읽으며 금각에 지배당했다.

'금각사'는 묻는다. 진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파괴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파괴되어야 비로소 해방되는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금각은 여전히 빛나고 있고, 그 불꽃은 지금도 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은, 끝내 매혹적이다. 소유할 수 없기에. 마치 완전함을 목마르게 좇듯, 절대성을 향해 숨죽이듯, 신을 우러르듯, 나는 금각이 상징하던 그것에 매혹되었다. 그것은 이상 그 자체였고,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신성의 형상이었다.


금각.

Beautiful Things - Benson Boone

Pyro - Kings Of Leon

New Born - Muse

Words Skylar - G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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