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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건 때로 위험한 일이었다

돈보다 더 아팠던 건,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

by 머니데일리

시작은 소소한 호의였다

지인은 오래전 회사에서 알게 된 선배였다. 평소에 연락을 자주 하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SNS에서 몇 번 안부를 주고받았고, 오랜만에 밥 한 끼 하자는 말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대화는 평범했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아이 얘기를 하고, 요즘 회사 분위기가 어떠한지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재테크 이야기로 흘렀다.


요즘처럼 금리가 오르는 시기엔 현금보다 ‘돌아가는 돈’이 필요하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그냥 좋은 사람이었다. 호의로 만나준 거였고, 조언 하나쯤은 귀 기울여도 괜찮다고.


나는 그냥, 사람을 믿었다

며칠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소액으로 시작해보면 어떻겠냐고. 그가 직접 운영하는 건 아니고, 자산가 몇 명과 함께 돌리는 구조라며 안정적인 수익률을 보여줬다. 물론 계약서는 없었다. 다들 지인들끼리 신뢰로 한다고 했다.


그래도 불안해서 몇 번 더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형, 내가 너한테 그럴 사람이야?"


그 말 한마디에 더 묻는 게 미안해졌다. 사람 사이에 그렇게까지 확인을 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어차피 큰돈도 아니었기에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나는 결국 300만 원을 송금했다. 그게 전부였다.


돈보다 더 무너진 건 내 자존감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도 소식이 없었다. 카톡은 씹혔고, 전화는 꺼져 있었다. 그제서야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다. 수익금은커녕, 원금도 보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끝이 났다.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계약서도 없고, 증거도 없었다. 처음 며칠은 화가 났지만, 곧 자책으로 바뀌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망설이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사람 아닌 줄 알았는데’ 하는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군가에게 속았다는 것보다, 내가 그렇게 허술했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나는 몇 주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너무 부끄러웠다. 돈도 잃었지만, 자존감도 잃은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뜻밖에도 그는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서야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 후로는 가족에게도, 가까운 지인에게도 말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솔직하게. 이런 이야기는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나만 알고 있으면 누군가는 또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관계를 맺는다

그 후 나는 누군가를 완전히 믿는 일에 시간을 들이게 되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너무 친절한 사람일수록 한 번 더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람을 의심만 하고 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제는 나 자신에게 먼저 묻는다.


나는 이 선택을 납득할 수 있는가. 필요한 건 불신이 아니라, 건강한 거리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믿는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때로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된 지금,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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