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하나. 창업을 시작하다.

[도메인도 모르던 미친자, 웹에이전시를 시작하다. ]

by 세화

무서운 스무 살의 봄을 맞이하며


98년 IMF. 나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친구들은 갈림길 앞에 섰다. 대학을 갈지, 취업을 할지.
운 좋게 대기업에 합격한 친구들은 대학 입학을 취소했다.
“졸업 후 대기업 간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 말이 그때는 현실적인 선택처럼 들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현실’이 먼저 무너졌다.
98년도 신규채용 합격자들에게 입사 취소가 나거나 대기발령이 떨어졌다.
결국 학교도, 입사도 가지 못한 친구들이 생겼다.


행복해야 할 스무 살의 봄을 우리는 그렇게 맞이했다.


오갈 곳이 없던 시절, 선택은 대학이었다


나 역시 오갈 곳이 없는 상태가 됐다. 상고를 나왔지만 대학 진학을 택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상 알바 없이 공부할 수는 없었다.


1학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2학년에도 장학금을 받았다.
그런데 2학기에는 결국 장학금을 놓쳤다.
알바와 학업을 동시에 끌고 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버거웠다.


그때 나는 이미 ‘돈’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늘 학비를 걱정했다. 친구 엄마에게 빌리기도 했고, 엑스트라 알바를 하며 버텨야 했다. 대학에 가서만큼은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단순했다.


“돈 벌어 오자.”



500만 원 한도, 세상이 열리는 줄 알았다


IMF 이후 정부는 현금 흐름을 살리겠다고 카드 문턱을 낮췄다.
발급은 쉬워졌고, 한도는 올라갔다. TV에서는 카드 광고가 쏟아졌다.


“내게 힘을 주는 LG카드여~~~”


대학생이던 내가 처음 만든 카드도 LG카드였다.
내가 처음 받은 한도는 500만 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지만, 그때 내게 500만 원은 ‘엄청난 돈’이었다.


손에 쥐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돈.


그때 나는 마음을 먹었다.


“돈을 벌어서 다시 학교로 돌아오자.”


그래서 호기롭게 휴학계를 냈다.


첫 번째 사업, 그리고 내가 가진 재능들


내가 어릴 때부터 줄곧 “공부 빼고는 웬만한 건 다 괜찮았던 것 같다”는 기억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그렇게 믿고 있다 하하하


그중 유독 잘한 건 글짓기와 미술이었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채색을 좋아했고, 학창 시절 여러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글짓기 역시 중학교 스승의 날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했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는 3년간 도서 대출을 가장 많이 한 학생으로 표창장을 받고 졸업했다.


다시 말해,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이고 미적 감각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시작한 첫 번째 사업은 여행 가이드 출판사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그때 이미 감으로 알았다.
고객들이 더 이상 ‘책’으로 정보를 찾지 않는 시대가 곧 온다는 것을.


나는 여행 정보를 싣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맛집 정보를 함께 구성했다.
맛집 정보 업체로부터 홍보비를 받아 책을 출판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들은 광고가 필요했고, 소개가 필요했고, 노출이 필요했다.
그럼 책 말고 인터넷 ‘홈페이지’가 답 아니야?


그래서 출판사를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바로 웹에이전시로 갈아탔다.


그때의 인터넷, 그리고 ‘확산’이라는 속도


당시 인터넷은 이제 막 대중에게 퍼지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98년 전후로 포털 서비스들이 등장하고, 이메일 서비스 등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개인 퍼스널 피시가 보급되기 시작한 때였고, 이 시기에 웹에이전시를 시작한 나는 내 인생을 확실히 바꿔줄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천리안, 하이텔 같은 통신을 유선전화에 연결해 쓰던 시절이라 전화요금이 엄청났다.

그런데 98년 이후부터는 인터넷이 전국에 확산 보급되기 시작했고, 2001년 내가 사업을 시작할 즈음엔 사람들 입에서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 그거, 전국 광고 나가는 거… 컴퓨터로 보면 된다던데.”


돌이켜보면 그 속도는, 지금 우리가 AI를 받아들이는 속도만큼 빠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의 첫 고객, 그리고 19만 8천 원의 심장소리


인천의 한 운전면허 자동차학원이 나의 첫 고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기본지식도 없이 이 사업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무식했지만 대범했다.
아니, 대범한 척을 해야만 했다.


첫 미팅에서 고객이 물었다.


“도메인은 얼마예요?”


나는 도메인이 뭔지도 몰랐다. (도메인이 뭔지도 모르면서 영업을 하는 진짜 미친자 바로 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모른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19만 8천 원이요.”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을 받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나는 스스로가 조금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나, 해냈다.” 같은 기분.


그런데 사무실에 오자마자 검색을 해봤다.


도메인 가격은 9,800원이었다.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사기 친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가슴이 쿵쿵 쿵쿵 뛰었다.
심장 소리가 사무실 전체를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전화가 울렸다.


‘그 고객이면 어떡하지.’


떨리는 손으로 받았는데 고객이 말했다.


“내 친구 것도… 홈페이지 그거 깔아줘.”


업.
나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말했다.


“네네. 도메인은 9,800원이고요. 나머지는 홈페이지 제작 비용이에요.”


위기를 넘겼다.
그땐 정말 위기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는데도,
어린 마음엔 “어른한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짓말했다”는 죄책감이 천둥처럼 크게 남았다.


지금은… 귀여운 기억이다.


20만 원짜리 홈페이지가 상품이 되던 시절


첫 수주에 이어 홈페이지 두 개를 동시에 잡게 되자, 나는 디자이너를 채용했다.
당시 최저임금은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크게 체감되지 않던 시절이라 급여도 천차만별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한 달 급여가 50~60만 원 수준이었던 것 같다. 시간당 1,600원쯤.


그렇게 디자이너를 채용하고, 나는 타고난 말솜씨와 색채감으로 “가성비 있는 퀄리티”를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나는 저가형 홈페이지 제작 회사가 되었고,
그게 상품이 되어 20만 원에서 40만 원 사이의 단가로 홈페이지를 만들던 시기가 이어졌다.


살기 위한 압박, 그리고 욕심이 만든 압박


처음엔 단순했다.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싶어서,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이 정도면 됐다, 이제 다시 공부하자.”
스스로를 멈추게 하는 날은 오지 않았다.


회사는 커졌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육아를 해야 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 내 나이가 됐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자금 압박 속에서 산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때의 압박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현실이었다면,
지금의 압박은 “내 욕심이 만든 결과”라는 점이다.


그 차이를 인정하는 순간, 내 이야기는 변명에서 기록이 되고,
후회에서 선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