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은, 살아남는 것.

고통뿐이라 생각되는 인생에서 우리의 존재는 어떻게 남아있는가?

by 상실

무의미한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법이 아닌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자신의 인생에 응용하는 타인의 가치관은 온전히 스스로의 것이 아니기에 본인의 상황에 맞춰 도와주지 못한다.


한 존재로서,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나아가는 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세상이라는 주인 없는 공허에서 고독히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각색의 여러 길과 자신이 동등하게 서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만일 느끼지 못하더라도 타인의 삶은 언제나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떠돌고 있다. 그리고 그 ''의 주인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인생의 멘토나 자신의, 타인의 친구들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가능성 또한 없앨 수는 없다. 그만큼 인간군상이라는 것은 다양하고 개인의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의 형태는 절대 일정하지 않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에 이토록 다양한 길들이 모여있는 걸, 혼자서 살아가겠다고 말을 할 수나 있을까? 단순히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이 세상이라는 곳에서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만일 혼자만의 길을 가려해도 저 멀리서 어렴풋이 사람의 형태가 보일 것이다. 아무리 부정해도, 아무리 묵묵하게 앞만 보더라도, 사람에게 사람은 지울 수 없는 외재성이다. 타인이 차라리 내부의 것이라면 자책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타인은 결국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 이 얼마나 절망적인가?


이러한 인생에서 고통이 결여된 사람이 얼마나 존재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인간 대부분은 모두 개인적인 고통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은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취업을 향한 현실적인 문제부터, 어떤 이는 인간관계의 상실감을, 또 어떤 이는 극단적인 파멸을 겪어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말을 조장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지만, 인간에게 고통이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 예언되어 있는 필연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조그마한 고통도 없이 자란 인간이 있다면 아마 합리주의적 성향이 강한, 이성주의적 이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을까 필자는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까? 만약 있다면, 고통 끝에는 잠시의 위안 이후의 또 다른 고통뿐이 존재하는 것을 어떤 수로, 어떤 방법으로 타파했을까? 쇼펜하우어식 고통의 윤회를 끊어낸 자는 진정 부처와 같은 세계의 성인(聖人) 들 뿐인가? 나의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고통을 이겨냈다고 말할만한 사람은 보기가 힘들다. 내가 보았던 고통을 겪었던(겪는) 사람들은 그저 모든 고통이 지나갈 때까지 버티거나, 스스로 고통의 파훼법을 찾아내던가 둘 중 하나였다. - 고통의 파훼법이라는 것 자체는 고통을 완화시킬만한 스스로 찾은 '버티는 방법' 자체를 말한다. - 이것은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무참히도 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고통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제가 현실에 존재하는 고통이라면, 당사자의 개입이 있든 없든, 좋게 풀리든 안 풀리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는 문제로 결국 해결될 것이고 자의적 선택 없이 고통은 자연스레 연해지게 된다. 또 완전히 정신적 고통(우울, 멜랑콜리, 정신병 등)은 원인을 찾기가 힘들고 외부의 것이 아닌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겨낸다고 할만한 것이 존재하기 힘들다. 고통에는 실체적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 우리는 고통을 이겨냈다고 말할 방법조차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외부의 요인으로 해결되니까. - 필자는 모든 인과는 외부에서 이루어진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음을 참고 바란다. 그것은 단순히 '사건이 자신의 외부에서 일어난다'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동의 인과는 외부와 연결되어 결과가 이루어지는, 인간 자신이 외부를 통해 세상에 이어진다는 존재론적 가치관이다.- 물론 종교가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어주고 마음의 안식을 줄 순 있지만,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연적인 고통이 사라졌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넘어져도 자신의 손을 잡아줄 초월적 믿음처가 생긴 것에 가깝다. - 현대에 들어선 종교의 역할에 대해 말했을 뿐이다. - 또한,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특수성 때문에 우리는 인간적인 고통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통뿐인 이런 세상에서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어째서 지금 살아있어 이 글을 읽을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고 스스로가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말해보자면, 본래 모든 생물에게 자살이라는 선택지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도 해당한다. 하지만 이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과 다르게 인간은 자살하는 동물이다. 우리는 어째서 다른 동물들과 달리 '자살'이라는 죽음을 경계해야 하는가?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이번 글에서 자살 자체에 대해 깊이 다루지는 않겠지만 죽음의 본능적 공포를 이겨내는 자살은 지친 인간의 도피성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그 도피라는 것은 결국 살아있음을 갈망하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것은 본능을 뛰어넘는 감정의 초월적 영역이다. 고통의 감정이 몸을 지배했을 때에 더 버틸 수 없는 인간은 현재 상황을 벗어나려 자살을 택하고 죽음 앞에서 생존본능이 들지만, 급박한 감정의 본능(도피)에 눌려 무시당한다. 인간을 자살하게 만드는 이론이 존재하기나 할까? 자살은 인간 생존본능의 역설이다.- 정말 고통에 정신이 죽어버렸다면, 쉬고 싶다는 도피가 어떻게 가능할까? 오히려 필자는 그 지성의 죽음이 더욱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이치를 거스르고, 죽음의 끝자락까지 가서도 삶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없다. 오로지 생존뿐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의 말을 중, “인간은 자유롭도록 단죄받았다.” 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대목이 존재한다. 또 다른 철학가 마르틴 하이데거가 주장한 개념 중 피투와 기투의 개념도 존재한다. 갑자기 철학 이야기로 넘어와 난해하겠지만, 그들의 말을 빌리는 이유가 있다. 살아남는 법을 말하기 이전에 살아남는 것 자체의 조건이기도 한 던져진 존재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에 관해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명료하게 하겠다.


실존주의적 성향이 강한 철학은 대개 인간이 던져진 존재라는 것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 모든 철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예외는 있겠지만, 필자가 아는 한에서는 그러하다. - 그 때문에 필자가 아는 실존주의의 성향이 강한 철학가의 개념을 잠시 빌려 오겠다. 사르트르의 ‘자유’, 하이데거의 ‘피투’. 이 둘은 인간으로서 태어남의 순간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며 자신의 부모와 나라를 자의적으로 선택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 보아라, 탄생의 순간이 기억나는가? 한 인간으로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이미 세상에 살고 있었다. 이것이 두 철학자가 말한 인간 탄생의 불완전성, 즉 우리가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옳지 않지만, 환원적으로 말하면 이 던져짐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피투'이며 사르트르의 '자유'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인간에게 피투 이외에 다른 특이점이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생태 피라미드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만큼 모든 생물이 지닌 천명과도 같은 종족 번식의 필요성이 많이 흐려졌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개방적인 개인의 자유, 심한 외모지상주의와 이기주의적 사회 분위기 그리고 급박한 생활문제가 조장되며 결혼과 육아 같은 것은 모두 현대인들에게 부차적인 것이 되어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결혼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그에 따라 고독사 비율은 매번 최고치를 경신한다. 인류가 80억을 넘어 지구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마당에 종 멸종 -전쟁, 파멸, 지구적 문제 제외. 약육강식 자연적인 먹이사슬만을 말한다. -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짐승의 발톱은 사냥감을 효율적으로 사살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새들의 둥지는 알을 낳고 부화시키며 새끼를 안전하게 키우기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서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종의 번식은 후순위고 자신의 실존만이 앞선다 - 글에서 말하듯 애당초 인간 실존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물학적 목표만을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유일한 방향성마저 흐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마지막 천명을 상실하며 인간에게 무언가를 해야 하는 이유 따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저 본질 없이 세상에 던져질 뿐이다.


내가 이 두 철학가와 인간의 특이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앞서 말했듯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제 '살아남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앞서 말했든 우리는 살면서 여러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그것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 정말 파멸적인 고통을 겪고서 인생의 끝자락에 죽음을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고통에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다. 큰 고통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사소한 고통은 너무나 익숙하다. 어린 시절 원하는 장난감을 얻지 못했을 때 오는 그 분통함, 진심을 건 친구와의 내기에서 졌을 때에 오는 질투심과 경쟁심, 타인과 비교했을 때 낙화처럼 짧게 스치는 위험한 자기혐오까지. 자살까지의 고통은 아니더라도 그 밑의 고통의 정도는 정말 다양하고 종류 또한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에 '이게 뭐야!' 하며 마치 죽을병이라도 걸린 듯 두려워하며 어색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고통에 익숙해져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언제부터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삶의 시작점에서부터 이어진 끈기이다.


세상에 던져진 인간으로서 해야 하는 것조차 없지만 삶에 대한 부담감만이 가중되었다. 심지어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부모조차 아이의 모든 생각, 모든 감정을 읽어 해결해 줄 수 없고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존재한다. 결국, 아이조차 고통을 스스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고통을 스스로 견디는 법을 익힌다. '이겨낸다'가 아니라 '버티는 방법'을 말이다. 유치원이 가기 싫은 아이는 눈물을 터트리지만 결국 유치원으로 가게 되고 억울함을 느끼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인 후 유치원의 끝을 기다린다. 시험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받은 학생은 부모에 의해 더욱 힘들어진 학원을 다녀야 하지만 학생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더욱 힘들어진 스케줄에 적응하는 것뿐이다. - 여기서 가출이나 학원을 가지 않는 것 같은 문제 상황이 바뀌는 것은 포함하지 않는다. - 취업에 실패한 20대는 차가운 현실에 절망하지만, 또 다른 회사에 서류를 넣으며 새로운 면접을 준비한다. 이처럼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삶의 방식이란,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이 끝나기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오히려 고통을 이겨낸다는 것이 오히려 도피가 되어 잘못된 결과를 불러오지 않을까? 예를 들어 부당한 수로 취업을 하거나, 취업에 지쳐 불법적인 일자리를 찾거나, 공부에 지쳐 시험을 포기하거나, 부모 몰래 학원을 가지 않는다거나 그런 것으로 변형되어 버린다면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옳을까? 물론 고통을 이겨낸다는 말이 무엇인지는 안다. 예를 들면 하이데거의 기투 같은, 자신의 현 상황에 적극 나서 더 나은 상황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것은 이겨내는 개념보다는 고통을 버티는 것에 가깝다. 이처럼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지혜는 자신의 실존 방식이다. 그것도 자신의 상황에 맞춘, 자신의 방식대로의 실존을. 취업을 준비하는 20대가 10대의 방식을 빌려 모의고사 준비를 하고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개개인의 상황과 그에 따른 개인의 방식이 존재한다.


아마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거의 다 한 것 같다. 이 글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글의 앞부분에도 적어놨듯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법이 아닌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자신의 인생에 응용하는 타인의 가치관은 온전히 스스로의 것이 아니기에 본인의 상황에 맞춰 도와주지 못한다.'이다. 고통이 익숙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고 그것은 결국 삶에 대한 의지로 이어진다. 우리가 자신의 탄생을 선택한 것이 아니므로 모든 전재는 살아있다는 것에 기반한다. 우리가 삶에 대해 생각을 하고 어떨 때는 고통을 받고 또 행복할 수 있는 것. 그것들 모두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있음 이전의 죽음에 대한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살아남는 것조차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의지'가 있는 모두에게 그 숭고함을 전해준다. 끝까지 버티며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길.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현 상황을 인지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무너지지 말고 세상에 반항하며 살기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다음은 글은 이번 글에서 모호했던 자살에 대해 자세히 다루어볼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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