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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이 먼저냐, 힘이 먼저냐

미시적 영원회귀

by abecekonyv
그런데 바울은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의 부활을 상상하듯 그렇게 생각한다. 저마다 특별한 영광과 함께 천상적인 육신과 지상적인 육신이 있다. 불후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자연적 몸이 있다면 그에게는 정신적 몸도 있다. 첫 번째 몸이 자연적 몸이고, 그 다음이 정신적 몸이다. 자연적 몸은 지상적 몸의 형상이고, 정신적 몸은 천상적(신의) 몸의 형상이다. 살과 피는 없다. 왜냐하면 부패하는 것은 부패하지 않은 것을 이어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 이후의 예수의 몸은 천상적, 정신적 몸, 신의 형상으로, 살과 피가 없이 불멸이다. 자연과 신의 대립에 따르면 이것은 자연적인 몸의 반대이다. 따라서 예수는 영적 존재이다. <유고(1864년 가을~1868년 봄)> 프리드리히 니체 김기선 옮김


니체의 선배들. 쇼펜하우어, 도스토옙스키, 바그너의 공통점을 살펴보자. 이들은 관념적이다. 칸트의 철학을 자신의 '의지'로 보고자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사변적 관념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그러나 그의 명징한 해석적 툴 역시 관념에 속한다. 이들은 이것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시대를 통찰하였다. 바그너는 오페라로 사랑의 관념을, 쇼펜하우어는 다학제적인 공부를 통한 관념을,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러시아의 불안함에 추동된 관념을. 모두 관념을 보았다. 그리고 그 관념이란 경험에서 출발한다. 오로지 시대의 통찰은 그 시대를 살아본 자들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거의 학문 전반을 망라하는 '의지'의 철학서이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신화와 사랑의 매개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날카로움은 시대정신이 어디로 나아가는가를 명확하게 짚어낸다. 그들의 철학은 사실 보편적, 추상적 공통 관념을 끄집어내기 위한 형이상학이라기 보단, 니체의 관점에서 처럼 생철학에 속한다. 삶에서 출발한 철학.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철학하기를 버리는게 불가능 했다. 수용소에서, 오로지 집에 칩거하며 헤겔이라는 개를 기르면서, 라이트모티브로 극중 인물에 사상을 투영하며. 그들은 진정한 관념론자들이다.


니체는 이들을 모두 배반하기에 이르렀다. 오로지 자신의 철학함에 몰두하기 위해 말이다. 그의 철학이란 단연 힘의 철학, 혹은 상승의 철학이다. 힘에의 의지Wille zu Macht, 영원회귀, 초인Ubermensch, 디오니소스적 비극의 사상은 하나로 축약하자면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상승의 힘이다. 도취가 자신의 사상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이런 도취가 몰고 온 비극은 얼마지나지 않아 나타난다. 히틀러는 니체를 오독했고, 레닌 역시 니체를 읽었다. 마오쩌둥 역시 니체를 읽는다. 이들이 니체의 사상을 오해했다고들 말하지만, 니체의 생철학은 깊이 보지 않으면 관념론자들을 오해하게 만든다. 그것은 겉보기에 관념론자들의 눈에 '형식'이라는게 비어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윤회관은 오로지 자신안에서만 벌어진다. 따라서 윤회란 우리가 힌두신화에서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달리,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 내재성 담론이 펼쳐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러나 니체의 사상은 극단적인 자신의 일생과도 닯아있다. 따라서 그것의 힘이란 그에게 맥락이 존재하지만, 오로지 니체의 맥락에서 벗어난 힘의 개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깊게 생각해야한다. 니체의 생철학은 변용될 여지가 그렇기 때문에 크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기억이론을 원뿔 도식으로 설명한 적 있다. 거꾸로 세운 원뿔의 꼭짓점이 바닥을 바라보는 형태이다. 원뿔 전체는 무의식에 보존된 순수 기억 전체를 말한다. 미래에 어느 순간에는 니체의 변용이 축적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쓰여졌는지는 미래인들만이 알 수 있다. 우리는 비록 오해의 측면이지만, 파시즘과 공산당, 사회주의의 변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들뢰즈가 스피노자-니체-베르그송이라는 비주류 흐름을 파면서 자신의 철학을 경험주의의 토대에서 끌어올린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니체의 내재성의 극단성을 바라본게 아닐까. 니체의 보편성을 어디까지 끌어내야 하는지 고심해본게 아닐까. 내재성의 문제는, 그것이 다른 모나드들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오로지 수학적인 개념의 연역마냥 극단적인 내면의 비틀림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의 균형을 이루는 외재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원뿔 전체를 모른다. 그러나 어떤 분할면을 이미 보았다. 따라서 들뢰즈는 니체의 반-형이상학적 태도를 존중하며 경험이 이루는 형이상학적 형식을 바라본지도 모른다.


러시아나 중국이나 그들은 꽤나 비슷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레닌-마르크스주의가 들어서기 이전 그들의 사회는 매우 불안정 했다. 러시아는 서유럽을 동경하며 자신들의 아시아적 정체성에 흔들렸고, 중국은 영국의 아편 공작으로 나라가 서양에 의해 위태로웠다. 그들의 세기말적 분위기에서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다. 국민을 계도하고 새로운 목적을 제시해줄 리더가 필요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히틀러도 그런 독일의 불안속에서 투표를 통해서 당선되었다. 따라서 공산주의라는 망령이 그들을 가리웠지만, 그들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니체란, 자신들의 체제를 미는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방세계 유약한 이론가들을 타파해버릴 자신들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악령>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뿐만아니라, 미시적인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전신이라 볼 수 있는 도스토옙스키는 목적없는 행동만이 양산되는 사회주의 급진파들을 견제했다. 그들에겐 오로지 힘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계도해야 한다. 천재들의 산을 깎아버려야 한다는 스테판 베르호벤스키의 선언 처럼 말이다. 인간 하나 하나를 새로운 병사로 탄생시켜야 한다. 미시적인 영역이 거시적인 영역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행동가 언행 하나하나가 사회주의에 봉사해야 한다. 따라서 유물론이란 통제의 형태로 밖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개인의 관념이 피어오르기 전에 애초에 싹을 잘라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유물론이란 물질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목적성을 달성하기 위해 존재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이라는 시대정신을 뒤집었지만, 그에게도 목적성이 있었다. 노동자들의 단결말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거대한 해방의 서사에서 탈피한 포스트모던을 규칙쪼개기로 보았다. 그러나 니체의 변용이 나타난 것 처럼. 우리는 포스트모던 속에서도 어떤 힘을 발견 할 수 있다. 무한히 쪼개라는 가속주의의 힘말이다. 니체의 힘이란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따라서 니체의 힘이란 오독하기가 쉬운 개념이다. 따라서 어느 곳에 붙여도 그들을 가속하게 만든다. 병사에게 계급장을 달아주는 장군같이 기능한다. 병사는 사기가 벅차올라 전투에 대한 긍지를 불태운다. 니체라는 장군이 모든 사상을 통제하고 사기를 진작시킨다. 제군들에게 묻는 의문은 모두 하나로 종속된다. 제군들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답은 이미 항상 정해져있다. 각 병사들의 목적에 맞게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든, 우리 집을 지키든, 전쟁광의 광기든 말이다. 그들에겐 무한한 도취만이 존재한다.


니체는 어느 시대에서나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 할 것이다. 새로운 사상에 힘입어 육화할 것이다. 죽지않는 사상. 그가 말한 영원회귀의 새로운 모습. 오로지 같은 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삶이 아니라. 미시적인 관점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사상의 진화. 예수가 영적 존재라면, 니체도 영적 존재이다. 니체라는 망령이 현대를 배회한다. 앞으로는 기계 갑옷을 입은 니체의 모습이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니체는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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