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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절망

좌절하는 언어

by abecekonyv

'텍스트를 읽지 마라' 이 글은 자기모순이다. 러셀의 이발사 마냥 자기모순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읽기 전에 내용을 파악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명령조의 이 문구는 우리에게 지시한다. 그러나 읽는 순간 바로 우리의 지령은 좌절된다. 소설은 사실 이런 자기모순에 의한 것 같다. 텍스트는 우리에게 지시한다. 감정이든, 이성이든 어디론가 향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을 읽는 순간 좌절된다. 텍스트의 내용이 현실과는 이어지기에는 너무나 순수하기에. 혹은 나의 순진함이 소설을 읽음으로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 읽기란 읽지-않음이다. 그것을 읽는 순간 좌절 된다.


단편소설에서 이런 읽지-않음은 두드러진다. 텍스트의 농축성은 길이에 좌우된다. 그것의 길이가 짧을 수록 가능성을 품게 된다. 그것의 문장이 짧을 수록 풍경을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읽는 순간 좌절된다는 말은 그것을 바라 볼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아구타가와 류노스케의 <토록코>에서 시골에서 인부들이 트럭을 밀며 당기며 애쓰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좌절된다. 왜냐하면 텍스트의 지시가 애초에 도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류노스케는 이 단편을 쓸 때, 분명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도달하는게 우리는 불가능하다. 이것을 지나친 엄밀함에 호소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의 가능성이란 이런 도달 불가능성에 있다. 류노스케의 감각에는 도달하지 못 할 지라도, 우리의 감각으로 그것을 재현해내야 한다. 텍스트는 그것의 매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읽는 순간 좌절되는 것이다. 텍스트를 읽지 말라는 것은 그것을 바로 보라는 것인데, 우리는 텍스트를 매개로 해야만 그것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프랑스어는 언어의 절망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프랑스어의 끝모음은 거의 발음하지 않는다. 정서법이 고답적이지만, 그들의 언어는 끝모음이 닳아버렸다. Les Pieds의 ds는 들리지 않는다. 이는 언어의 장애성, 혹은 언어의 본질이라는게 도달 불가능함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항상 배반당한다. 언어로 말이다. 그것은 항상 뚜렷하지 않다. 개인의 변용으로. 타인의 변용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바꿔낸다. 형식이 허용되는 한에서 그것은 카멜레온 처럼 주체의 감각에 맞추어 색을 바꾼다. 언어의 이미지라는 것은 비어있는 형식이다. 따라서 주체에게 허용되는 것은 그것을 칠하는 색깔놀이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 프랑스어의 모음이 닳아버린 것은, 그런 해석의 절망이 표현된게 아닐까. 어짜피 똑같이 그려내지 못하는데, 언어도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따라서 문학이란 교훈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배경만을 묘사하는 류노스케의 단편 처럼, 그것을 미문으로만 남겨두고 싶은 욕구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소설이다. 소설이 무엇을 말한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아무런 목적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냥 본다는 미덕을 잊어버린지도 모르겠다. 단지 인생이란게 그냥 보는 것임을. 그러나 어떤 효율성과 목적성에 눈이 팔려 그냥 본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산다는 것은, 단지 감각하는 것만이 존재한다. 우리의 감각중 가장 강한 감각. 그것은 시각이다. 단지 바라봄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외부의 소음이 그것을 방해 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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