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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16

by abecekonyv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데미안의 문장을 상기시켜보자. 그 말에는 결과라는 것이 없다. 알을 깨부수고 태어났는지, 알 안에 갇혀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투쟁한다는 행위의 언어로만 말해진다. 이것은 주목 할 만한 이야기이다. 알을 깨지 못하는 병아리들을 위해 닭들은 쪼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알을 깨지 못하고 방치되어 썩어가는 병아리들도 생겨난다.


작가들이 불쌍해질 때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써낸 위대한 작품들을 스스로 감탄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방황한다.


자신의 육체도 나의 두 눈으로 온전히 감각 할 수는 없다. 거울이라는 매개가 필요로 한다.


따라서 나의 육신도 타자이다.


주체와 타자의 변증법은 우리의 관념에서만 이야기 된다. 따라서 주체가 육화된 나의 몸도 그것을 반성해보기란 힘들게 된다. 나는 진정 자신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타인의 평가에 의해 반성적인 작용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타인의 평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아름답다고 평가 할 건덕지도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나의 모국어라는 말은 굉장히 이상하다. 그것은 반성이 아니라 선언이다. 적어도 모국어 화자에겐 말이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모국어가 타자화 되어야 한다. 말을 한 번 잃어 본 적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여실히 느낀다.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어를 잃어 본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언어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땅을 밟고 사는 이들에게는 모국어가 익숙하다. 따라서 추해보인다.


자부심이라는 말은 따라서 진정으로 느끼려면 반성이 필요하다. 변증법을 한 번 거치고 와야 한다. 따라서 자신을 인정한다는 말들은 경험을 제외하면 선언에 불구하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흑인들의 위태로운 현실을 반영하는 말들이다. 변증법이 부정의 역사라는 지젝의 말은 따라서 타당하다. 그것은 아뢰야식의 세계에 피의 문장들을 아로히 새겨나간다.


인간의 경험이란 근본에 기초한다. 따라서 나의 경험이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씨앗 종자의 표현형이 어느정도 정해져있듯이 말이다. 그것에게 기형적인 것들이란 키가 2m정도 자라는 장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장미가 팬지가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씨앗이라는 것은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는다. 유전자의 염기서열은 무한소의 개념이지, 무한히 뻗어나가는 양의 무한은 아닌 것이다.


혁명은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일 수 밖에 없다. 이미 억압을 견딘자들의 포효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의 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가 될 때에만 혁명이 피어오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사실 노예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변증법은 운동이다. 그러나 운동을 말하는 항은 노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은 주체에게 발전은 없다. 움직일만한 동력도 없다.


따라서 잃어야만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낀다. 여기에는 어떤 교환양식이 존재한다. 사탄의 교환체계인 것이다. 무엇을 얻어내려면 무엇을 내놓아야 한다. 자신이 타자가 될 때에는 자신이 물질로 다뤄질 때이다. 나의 육체가 타자라면, 나의 아내도 타자이다. 둘의 불화라는 것은 물질 세계에만 존재한다. 타자와 타자의 교류는 나의 인식 속에서는 단지 타자로서만 존재한다. 내가 물질 세계에 관여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일까? 그것의 정도는 권능에 있다. 사지마비에 걸린 사람들은 오로지 정신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주체와 나의 육신이 이어지는 권능의 양적 차이가 우리의 틈이다. 틈은 예술과 학문을 만들어 낸다. 틈이 좁던 넓던 양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곳에서는 예술이 피어오른다. 좁은 틈에서는 날카로운 예술이, 넓은 틈에서는 풍부한 예술이 피어오른다. 작가란 오직 외로운 존재들이기 때문에 풍부하다. 경험 많은 자들의 글들은 첨예하다. 그들의 차이는 이런 도심의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과도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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