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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에 대해

by abecekonyv

나에게 노력이란 인간적인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력努力이란 한자가 주지하듯이 노예의 측면이 분명 들어있다. 따라서 나에게 노력이란, 어짜피 할 수 밖에 없는 것에 속한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이다. 나의 노력에는 부정적인 것이 없다. 노력이 부정적일 때는 타인의 입에서 나올 때이다. 누군가 나의 노력을 평가한다면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 된다. 성적을 받아서 괴롭다는 느낌은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의 행동에 대한 간섭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타인에게 나의 노력의 방향을 맞춰야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런 경우 나의 방향성도 존중하려면, 더 내어주어야 한다. 오른 뺨을 때리는 상대방에게 왼뺨도 내놓아야한다. 십리를 가자 부탁하면 백리를 가줘야한다. 내가 먼저 마음을 내어 상대방을 다뤄야 한다. 그제서야 나는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시험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삶을 산 것 같다. 초등학생 시절 부터 지금까지 시험은 항상 있어왔지만,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성적이 잘 나왔다고 내 실력이 출중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를 잘 하려면 시험을 넘어서야 한다. 나는 적어도 기준이 높은 것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언어를 내 수준으로 체화 할 때의 쾌감이 만족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한 수준이다. 따라서 나의 기준은 시험을 넘어선다. 그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의미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기준을 통과한다면 이제는 시험을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시험을 잘 보았지만 시험을 경멸한다는 기만스러운 언어는 사용하기 꺼려진다. 나는 시험에 잠깐이라도 일희일비한 순간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내 입 밖으로 이런 언어가 나온다면 나는 하루종일 괴로워 할 것이다.


그러나 평가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한 것이기에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사실 재능이나 노력에 대해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가장 인간적인 노력,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재능. 둘 다 말 할 수 없는 것들에 불과한게 아닐까?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들은 극히 유물론적인 것들에도 해당하지 않을까?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다는 이야기는 현미경과 망원경의 발달로 좁혀진다. 그러나 그것의 한계는 기술로 특징지어진다. 어짜피 현실계는 우리의 곁에 존재한다. 그것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 조차 말 할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노력이란 것도 말 할게 별로 없는 것이다. 내겐 인간적인 것의 극한이자 도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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