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할아버지 시기에 아고라가 있었다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Daum에 아고라라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이 자유로이 토론하던 장소인 아고라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초창기에는 유저들끼리 특정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싸우고 청원까지도 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했지만 언젠가부터 '난장판'이 되어서 폐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스에 가는 걸로 결정됐을 때 짝퉁 아고라 말고 진짜배기 아고라를 가볼 수 있다는 것에 매우 기대를 가졌다. 한국에서도 국사책에 나오는 장소에 가보는 걸 좋아해서 암사동 신석기 유적지, 제천 의림지, 영풍 부석사, 합천 해인사 등에 종종 가곤 했는데 왕년의 세계 일짱 그리스의 아고라라니! 2500년 전 시민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 팔고, 음악과 공연을 관람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소크라테스의 강연을 듣고, 정치를 논하고, 심지어 독재자가 될 위험성이 있는 사람을 도자기 조각에 적어 다수표가 나온 사람을 쫓아내기도 했던 진짜 아고라에 간다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공간에서 그 당시를 상상해 보고 싶었다.
난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가 별개의 공간인 줄 알았는데 실제 가보니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아고라 광장을 가로지르는 Panathenaic Way를 따라가면 아크로폴리스 언덕으로 이어진다. 가장 번화한 곳에 있는 대로이니 지금 우리나라로 치면 광화문 앞 세종대로 정도 되겠다. 아마 당시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셀럽들이 여기로 많이 오갔겠지. 또 무슨 큰 행사가 있으면 여기에서 지금의 카퍼레이드 비슷한 것들도 했겠지.
이 큰 길 오른쪽으로 사람들이 장사하고 토론하던 광장 터가 있다. 지금은 다 무너졌지만 크고 작은 돌덩이(?)에 이름이 붙어 있어서 여기가 당시에 어떤 장소였는지는 알 수 있었다. 우선 아고라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는 Middle Stoa가 보였다. 와, 길이 147m*폭 17.5m 짜리 건물이면 지금 기준으로도 보통 웅장한 건물이 아닌데 그게 기원전에 있었다니. 아마 온갖 종류의 상점들이 다 들어있는 스타필드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너무도 고마운 건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헤파이스토스 신전이다. 기원전 450~440년경 건축됐다는데 다른 신전들과 달리 기둥들이 대부분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불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로마신화에선 불카누스)의 이름을 땄다. 신화에서 이 양반 생각하면 안습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미모로는 비교불가 넘버원이었던 아프로디테와 결혼했지만 그녀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속을 많이 썩은 분이다. 아내가 전쟁의 신 아레스와 바람피운다는 이야기를 태양신 아폴론으로부터 듣고 열받아서 이들의 불륜현장을 덮치는 스토리는 이후 많은 화가들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했다. 특히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틴토레토(Tintoreto)의 <비너스와 아레스>는 헤파이스토스가 일하다 말고 달려와 아내 아프로디테와 '샛서방' 아레스와의 불륜현장을 덮치는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오른쪽에 보면 아레스 도망간다~).
아고라 광장 왼편에는 박물관이 있었다. 여기에 내가 그토록 보고팠던 도편추방제(Ostracism) 도자기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직접 민주주의의 산실 아고라에선 시민 6천명 이상이 모인 회의를 열어 독재자가 될만한 자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적어 최다득표자를 10년간 아테네 밖으로 쫓아버렸다고 한다. 당시에도 온갖 선전과 선동으로 인해 제도가 악용되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 유명한 도자기 조각을 눈으로 직접 보다니!
역사적 의미와 별개로 아고라는 아테네 최고의 뷰까지 선물로 주었다. 헤파이스토스 신전 앞에서 바라보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은 배경과 구도 모두 더할 나위없이 최고였다. 그 옛날 아테네 사람들도 아고라 헤파이스토스 신전 앞에서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눴겠지. 그 때 그 사람들은 한참 후 동양에서 온 한 사람이 자기들을 떠올리며 감동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고라에 널려 있는 돌덩이들에서 그 옛날 아테네 시민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보람찬 하루였다. 기쁜 마음으로 버킷리스트의 한줄을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