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살아봤습니다-27(크레타 여행)

곳곳에 삶과 신화가 어우러진 크레타

by AMAP

크레타에 다녀온 게 2018년 여름이었으니 벌써 7년 전이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그래도 당시 사진들을 보니 2박 3일간 경험했던 일들이 거의 모두 기억난다. 세월이 가져다 주는 망각의 힘보다는 기억의 무게가 훨씬 더 컸나 보다.


지도.jpg
20180125_104914.jpg
(좌) 크레타섬 위치, (우) 미노타우루스 흉상(아테네 고고학박물관)

크레타하면 우선 떠오르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 지중해 정중앙에 위치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앞선 문명을 먼저 받아들여 미노아 문명을 꽃피웠다는 점과 나중에 이를 유럽에 전파해서 유럽문명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

둘) 아테네 왕자 테세우스와 반인반수 괴물 미노타우루스 신화


겨우 2박3일짜리 여행이었지만 ‘極 ISTJ’답게 계획을 면밀하게 짜서 거의 ‘분 단위’로 움직였다. 빡빡한 일정을 따라준 가족들에게 늘 감사하며 다녔다.


황소 술잔.jpg 황소머리 술잔

크레타 미노아 문명을 보기 위해 우선 박물관으로 갔다. 많은 유물 중에 황소머리 모양의 술잔(B.C. 16세기)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크레타 미노스왕 신화 중에 소와 관련된 막장 내용이 생각났다. 미노스왕의 부인 파시파에가 왕실의 소를 사랑해서 그 사이에서 반인반수 괴물 미노타우루스가 태어났는데 미노스왕이 열받아서 미궁에 가둬버렸다는. 신화가 말도 안되는 뻥이라고는 해도 그 안에 진실이 일부 섞였을 거라고 보면 당시 크레타 사람들은 소를 숭배했을 걸로 추정된다. 그러니 이런 거대한 술잔을 만들었겠지.


20180728_115436.jpg
20180728_115329.jpg
문어 그림이 그려진 도기

또 재미난 특징은 문어 그림이 그려진 도기들이(B.C.15세기) 꽤 여럿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문어 요리를 즐겨 먹는다. 어느 현지 식당에 가도 문어는 항상 인기 있는 전채 메뉴이다. 3,500년 전에도 크레타 사람들은 문어를 즐겨 먹었나 보다. 문어의 형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도기에 그려진 문어는 옛날 크레타 버전이 훨씬 실감나고 익살스럽다.


추수.jpg 추수하러 가는 사람들

추수 장면이 그려진 항아리도 재미있었다. 남자 27명이 농기구를 둘러메고 일하러 가는데 나름 표정이 진지하다. 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과하게 진지한 모습이 오히려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이것도 B.C.15세기 작품이다. 그 당시에 사람 표정을 이렇게 정교하게 표현했다는 게 놀랍다. 예전 고우영 삼국지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 같기도 하고.


1532977845012.jpg
1532977862911.jpg
1532977907995.jpg
(좌) 크노소스 궁전, (중) 발굴된 그림, (우) 발굴된 그림

박물관 다음 코스는 크노소스 궁전이었다. 미노스왕의 궁전이라 해서 기대가 컸는데 실망도 컸다. 궁전터는 그대로였겠지만 발굴자 아서 에반스(Arthur Evans)의 과도한 욕심이 이 귀한 유적지를 역대급으로 망쳐놓았다. '어이 아저씨, 발굴하느라 고생하신 건 충분히 인정하는데 원형 그대로 놔두셨어야지 자신의 상상력을 덧씌우면 어떡하나요! 수천 년 전 건물인데 거기에 근대의 색깔을 칠해놓으니 이도저도 아닌 우스꽝스런 모양이 돼버렸잖아요!' 복원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 때문에 아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벽화들도 수천 년 전 작품이라고 보기엔 너무 색깔이 선명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그래도 신화 속 미궁 터에 와본 걸로 입장료 값은 했다. 아테네가 크레타에 조공으로 바친 테세우스가 미노스왕의 딸 아드리아네 공주 덕분에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 미궁을 빠져나왔다는 바로 거기였다. 어떤 책에 보니 크레타는 당시에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선진문물을 먼저 받아들여서 그 힘으로 그리스를 압도해서 조공을 받았는데, 나중에 아테네의 어떤 영웅이 그 조공 관계를 끊어버린 사건을 신화로 만들었을 거라고 한다. 충분히 그럴 듯 하다.


발로스 해변.jpg 발로스 해변.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힌단다(사진출처 : 구글)

제주도도 이삼일로는 태부족인데 제주도 면적의 4.5배나 되는데다 볼거리가 즐비한 크레타섬에 와서 겨우 2박3일 머물렀다. 섬의 동북부 일부만 살짝 만지다 온 셈이다. 직장과 애들 학교 때문에 다시 오기는 매우 힘들 거라는 걸 생각하니 집에 가는 길이 아쉬움 투성이였다. 제우스가 태어난 곳이라는데..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Balos Beach도 여기에 있다는데..


언젠가 다시 가볼 수 있을까. 그럼 최소한 열흘 정도는 머무르고 싶다.


p.s.) 신약 디도서 1장 12-13절에 보면, ‘그레데인(크레타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라고 쓰여있다. 2박3일 여행하면서 만난 그레데인들이 특별히 이상하진 않던데? 그 선지자 돈 떼인 적 있나?

작가의 이전글그리스에서 살아봤습니다-26(진정한 자유인, 조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