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과 심미주의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다. 달이 떠있다. 달을 보고 있자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로지 내 눈에 비치는 달빛과 나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다. 심미주의자들은 이런 순간들이 인생을 가득 채우기를 바랄 것이다. 매 순간 아무런 목적과 의미부여 없이, 오로지 대상을 감각적으로 탐미하며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삶. 그런 삶을 살고자 할 것이다. 심미주의적 삶의 태도는 경험의 매 순간을 풍부하고 정열적으로 살게 한다.
심미주의적 삶의 태도는 현대인들에게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흐름 속에서 항상 앞을 바라보며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의 소중함을 쉽게 잊는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심미주의적 태도는 잠시 사회와 목적의 의무로부터 물러나 주위를 둘러싼 소리와 공간에 집중하며 감각적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 것을 권유한다. 이 제안은 열의 없는 일상적인 일들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찰나의 순간에 대한 자각의 여지를 준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볼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흐름에 편승하여 우리 앞에 놓인 일들을 처리하느라 현재의 소중함을 잊고 말 것이다. 이렇게 나중에 맺을 결실을 기대하며 현재의 순간들을 소비하는 삶을 심미주의자들은 ‘실제적 삶’이라 부르며 비판한다. 실제적 삶을 살 때 현재의 순간들은 아무런 감각적 경험과 아름다움을 남기지 못한 채 빠른 속도로 과거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현대인들이 심미주의적 삶의 태도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만, 과연 그들이 심미주의적 삶을 온전히 살아갈 가능성이 있는가? 현대인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제적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심미주의란 본질적으로 현재에 고정된 예술을 위한 삶에 대한 것이므로, 연속적인 삶에서의 해답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심미주의적 삶을 산다면 찰나의 순간에는 향유하는 데 좋으면서도 그 순간들이 이끄는 곳으로 가면 비참한 결과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찰나에 머무르지 않으면서도, 그 찰나를 예술처럼 느끼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즉, 실제적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의 순간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노동은 본질적으로 돈과 생존을 위한 목적성을 가진 활동으로, 심미주의자들이 정의하는 예술의 조건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으로부터 심미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대인들이 노동을 하는 순간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노동을 하다 보면 노동의 본질적 목적을 잊고 그 순간의 체험으로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어쩌면 지금 이 행위가 노동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온전히 그 순간을 느끼게 된다. 햇빛이 스치는 사무실의 모습, 타자를 치며 느껴지는 손 끝의 감각, 그리고 자판소리. 더 나아가 몰입 그 자체로부터 오는 정신적 청명감까지 느낄 수 있다. 이럴 때 비로소 우리는 실제적인 삶을 살면서도 그 속에서 심미주의적 요소를 찾아내어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실제적 삶 속에서도 몰입의 순간에 목적의식을 망각하고 우리의 행위 자체를 온전히 느끼며 아름다움을 찾는 시도를 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매 순간을 심미주의적으로 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