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딸이였나

2. 판타지 소설속 주인공이 나에게 하는 말

by 사람이되는중

어린 시절, 책장 한켠에 꽂혀 있던 기억 중 행복했던 순간을 뽑으라면, 아빠와 동생들과 함께 겔러리아 백화점 지하 1층에 있던 서점에서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 마지막 권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 떠오른다. 집으로 가는길 아빠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그 빈 컵을 책이 들어 있던 봉투에 아무렇지 않게 넣는 바람에 책 윗부분이 사자마자 초콜릿으로 범벅이 되었던 기억이다. 속상했지만 6년만에 마지막권을 읽을 수 있다는 그 기쁨은 이뤄 말 할 수 없었다.


“Look, I didn't want to be a half-blood.
If you're reading this because you think you might be one, my advice is: close this book right now.”

Percy Jackson and the Olympians 1권 중


보기만 해도 심장이 떨리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혹시라도 이 책을 읽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면 당장 덮으라니, 어린이 독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뒤흔들렸겠는가. 그리고 그 ‘흔들린 어린이’들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이 책의 주인공, 퍼시 잭슨(페르세우스 잭슨)은 심각한 ADHD 증상을 가진 문제아로, 여러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전적이 있다. 그의 양아버지인 가브는 퍼시와 엄마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퍼시는 자신이 반은 인간, 반은 신인 ‘반인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영웅으로서의 여정이 시작된다.

완벽하지 않은 주인공, 성장형 먼치킨 주인공인 퍼시잭슨의 이야기는 어딘가 나와 닮은 곳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 계기도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엄마가 지나가듯 나에게 말했다.

“너는 어릴 때는 책 참 좋아했는데, 요즘은 왜 안 읽어?”

나는 두 명의 동생이 있는 첫째였고, 자연스럽게 엄마의 사랑은 동생들과 나눠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그 한마디는 기회처럼 느껴졌다.


‘두꺼운 책을 읽으면 엄마가 나를 봐주실까?’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도서관 맨 뒷편, 장편 소설들이 모여 있는 칸으로 향했다.
가장 눈에 띄는 책은 단연 『해리포터』였다. 영화를 본적은 없지만 저 책이 유명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해리포터』는 너무 어려웠다. 번역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초등학교 1학년이 읽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표현이 많아서인지, 책을 빌려간 지 하루 만에 반납하고 말았다.

그 무렵 우리 학교에서는 홍은영 작가의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도 엄마에게 사달라고 졸랐지만 결국 사주지 않으셨고, 친구들 책을 가끔 빌려 보곤 했다. 덕분에 1학년 치고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꽤 자신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해리 포터』 옆에 놓여 있던 책 제목 중 ‘올림포스’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아무 망설임 없이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을 골랐다. 그렇게 나와 퍼시 잭슨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퍼시 잭슨을 처음 읽었을 당시, 엄마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나를 통해 이루어보려 하셨다.
장녀라고 밀어주신다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너무 버거웠다.

나는 주말마다 새벽 1시에 일어나 서울로 가 연기학원을 다녔다.
내성적이고, 집에 있는 걸 좋아하며,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싫었던 나에게 그 시간들은 너무나 괴로웠다.
그런데도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시기, 받아쓰기 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자주 혼났고, 때로는 맞기도 했다.
그런 엄마에게 "나 연기학원 다니기 싫어"라는 말은, 감히 꺼낼 수도 없는 금기와도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을 꺼내 들었다.
이미 읽은 부분을 또 읽고, 또 읽었다.

퍼시는 완벽한 주인공이 아니었다.
ADHD가 있었고,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영웅이 되었다.

나는 그런 퍼시의 모습에서 위로를 받았다.
‘나도 언젠가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그 희망 하나로 버텼다.

그 시절의 나는 너무 어렸고, 너무 외로웠다. 집안은 차가웠다.
말할 수 없었고, 말하지 않았기에 더 아팠다.
그 침묵 속에서 퍼시 잭슨은, 내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해주는 친구 같았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때보다 조금 더 내 마음을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

나에게 퍼시 잭슨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을 버티게 해준 유일한 마법이었다.
그 이야기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나로 자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때의 나처럼 힘든 누군가에게
그저 그런 책 한 권이 되어주기를 꿈꾼다.

작가의 이전글나는 어떤 딸이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