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해!

ADHD, 우울증을 가진 내가 시작을?

by 햇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시작을 잘하는지 그게 참 궁금하다. 일단 나는 정말 못하기 때문이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이 유명한 것 보면 시작은 모두에게 어려운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사람은 움직이는 존재이니, 시작이 불가피하다. 다들 이 어려운 시작을 하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냥 하기'이다.





ADHD의 특성인지는 몰라도, 하고 싶은 것은 충동적으로 시작해 버렸다.


'시작해야지~'


하는 생각이 채 들기도 전에, 이미 맛을 다 본 뒤 흥미를 곧 잃는 게 다반사였다.


여기서 하고 싶은 것은 주로 게임, 요리, 그림 등 나의 취미와 연결되는 것들이었다.


나에게 이런 류의 '시작'들은 별로 문제가 아니었다.

(너무 빨리 흥미를 잃고 끈기가 없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진짜 문제는 나에게 주어진 '일' 들이었다.

작게는 구몬 같은 학습지, 좀 나이 들고 나서는 수행평가 등 나의 학창 시절은 미루고 빠뜨리는 게 일상이었다.


뭐 끽하면 열몇 살 먹은 애가 숙제를 빠뜨리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숙제를 안 했던 이유가 '불안' 때문이었던 게 진짜 문제였던 것 같다.


아무래도 완벽해야 한다는 불안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유치원에 다닐 적에 , 하루 여행을 가느라 다음날 칠 받아쓰기를 외워가지 못했던 때가 있다.


시험지를 받고 다 풀고 채점을 하는데, 거의 다 틀려버렸다.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다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회피하고 싶었다.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하다가 결국 나는 화를 내며 분노발작을 했다.


마구 소리 지르며 울고, 가지런히 꽂혀있던 색연필들을 뽑아 떨어뜨리고,

제풀에 지쳐 쓰러지듯 잠깐 잠들고 일어났다.


그 작은 받아쓰기는 나의 완벽주의를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숙제나 과제를 하기 싫어서 안 한다기보다는

잘 해내지 못할게 두려워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 해야 한다는 불안에 떨다가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었다. 그마저도 제출을 못 했을 때 그 자책감은 꽤 심했다.


이 악순환이 반복되다가 결국 과제나 숙제를 넘어서 사소한 일들이라도 시작 자체를 피하게 되었다.


늘상 뭔갈 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손을 내미는 순간 내 마음속 소리는 늘 불안경보를 울렸다.


못하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처음에는 다 못하는데 그냥 해!'


그냥 하는 것. 그게 시작을 하는데에 가장 쉬운 길이라는 걸 20살 먹고 깨달았다.


불안 -> 시작 못함 -> 자책 -> 불안의 순환고리를 끊는 법은 아무 생각 없이 뭔가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기대도, 감정도, 열정도 없이 그냥 하는 것.


특히 잘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건조하게 대하기.


아무런 준비나 장비도 없이 시작하기.


딱 한 개만 하기.



이런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한 일들이 나를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더러운 방 한가운데에 무기력하게 누워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다. 화장실가기도, 뭔갈 먹기도 싫다. 양치하거나 샤워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손을 조금 들어 올려 이불을 살짝 걷어본다.

그러면 된 거다. 설령 그다음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도, 나는 시작을 했다. 그러니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씩 나아가면 된다.





요즘에도 미루는 것은 여전하다.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은 거다. 그럼에도 그냥 해! 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의 자책과 불안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아지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대신에 작은 행동 하나면 자책대신 뿌듯함을 얻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앞으로도 완벽주의가 만든 불안에 빠져 잘 시작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럼에도 물 위에 동동 떠서 마음속 깊이 아파하기보다는 발가락이라도 꼼지락거려 수면에 파동을 만들어내길 바란다. 그렇게라도 덜 아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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