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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음악은 사람을 속인다

기도 반주가 유발하는 거짓 감동에 대하여

by 시나브로 연구소

기도회 할 때 '깔아주는' 반주는 대체 왜 있는 걸까. 특히나 여러 교회가 연합한 대형 수련회는 드럼, 일렉기타, 신디사이저 등을 동원하여 기도할 때의 배경음악을 조성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기도회 때 깔리는 배경 음악의 필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싶어졌다. '대체 기도를 하는데 음악이 필요한 이유가 뭐지?'

그에 대한 답을 굳이 굳이 찾자면 '분위기'를 조성하고,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었다.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 자체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분위기'라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 진실된 기도에 도움이 되는지는 큰 의문이 든다. 게다가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인간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악을 들으며 수학 문제를 풀 수 없다. 음악을 들으며 누군가와 대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음악을 들으며 기도를 할 수는 없다. 두 가지 일을 아주 빠른 속도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일 뿐, 음악을 들으며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음악이 없을 때 더 집중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기도회 때 음악이 때문에 주의가 분산되고 산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기도 반주'는 단지 분위기를 조성하고,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소기능적인 측면뿐 아니라 더욱 거대하고 주술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바로 회중들의 '성령 체험'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음악은 인간에게 감동을 준다. 이는 인간의 귀로 들어온 음악이 뇌를 자극하여 도파민과 엔도르핀 같은 호르몬이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은 음악에 쉽게 감동하며 특정한 코드진행은 인간의 정서를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기도 반주를 통해 기도하는 성도들의 심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한다고 볼 수 있다.

기도할 때의 반주는 우리들을 '감동적인' 심리상태로 이끈다. 평소와 같은 기도를 읇조려도 음악이 있을 때는 없을 때보다 더 간절하고, 더 극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한 심리상태는 음악이 고조되고, 시간이 흘러 성도들이 이러한 분위기 속에 더욱 몰입하게 할수록 더 심화되어 마침내 가장 강력한 형태의 정서로 폭발하기도 한다. 많은 성도들은 그러한 심리 현상을 성령체험이나 하나님 만남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주로 찬양팀 리더나 목사님이 맡게 되는 기도회 인도자라는 사람은 모종의 압박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나님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 이 수련회 마지막 날 밤, 하나님께 만나달라고 부르짖읍시다!!" "성령님, 이 자리에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문장들을 듣고 있자면 왠지 이 기도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평소에는 도달하지 못한 특정한 심리적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갑작스럽게 눈물이 난다든지, 가슴이 '뜨거워' 진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한 압박감이 자리 잡은 데에는 그러한 멘트들 뿐 아니라 평상시에 한국 기독교 문화 내에서 접하게 되는 간증들, 설교들에서 강조하는 '인격적 만남'과 '뜨거운 성령의 임재'에 대한 왜곡된 인식 때문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강단에서, 혹은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간증을 접해온 이들은 갑자기 눈물이 났다느니, 혹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느니 하는 증언을 자주 하였고 그것을 접한 성도들은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은근한 기대와 함께 그러한 감정을 겪는 것이야말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자신이 도달해야 할 경지라고 여기는 오해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불'을 받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압박감 속에서 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그러한 심리적 상태를 만들어보려고 애쓰기도 한다.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일종의 억지 감동을 유발하여 '하나님을 만났다' '은혜받았다'라고 불리는 특정한 심리적 감동의 상태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몇몇 감성적인 이들, 소위 배우의 자질이 충분한 이들과 그날 연주된 배경음악이 자신의 취향이었던 이들은 억지로 그러한 감동을 제조하는 데 성공할 테고, 특유의 무미건조한 감성을 지닌 이들은 그러한 억지 감동을 착즙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 회중 중에는 실제로 복음에 감화되었고, 하나님을 만난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는 정말 적을 것이라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이 손쉽게 음악적 감동에 편승하여 그것을 자신도 모르게 음미하며 억지 감동을 '짜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찬양 인도자들이나 기도회 인도자들은 이러한 억지 감동을 착즙 하는 현장에 대한 비판적 사고 없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극적인 멘트 "성령이어 임하소서!!"로 회중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팔을 높이 쳐들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우는 기도의 현장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그들 자신조차 그러한 음악적 감동에 휩쓸려 고도의 심리적 기도를 반복한다.

이들이 느끼는 '감동'은 일반인들이 유명 가수의 콘서트에 가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기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특히나 고도의 현대 기술이 들어간 무대 장치와 조명, 사람의 마음속에 경외심을 주는 자욱한 연기, 다양한 악기들로 무장한 찬양팀들의 사운드는 그 어떤 대중가수의 콘서트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러한 '장치'들은 하나님 없이도, 복음에 대한 동의 없이도 사람을 울릴 수 있고, 극한의 감동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여름철이나 겨울철 수련회 철이 되면 교회 교역자들과 교사들은 수련회에 되도록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이들의 열성적인 홍보를 보고 있자면 꼭 수련회 만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장소라도 되는 것 같고 그 집회 현장에 그 어디서도 경험할 수 있는 신비한 마술적인 효력이 있기라도 한 것 같다. 물론 마술적인 효력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거대한 스크린과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조명, 전공자들의 악기 사운드는 정말이지 마술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감동'을 자아낸다.


수련회를 한국 교회 문화 전반에서 유독 중요시하거나 이상화하는 이유는 수련회에서 음악과 '분위기'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청각적, 시각적 자극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번 수련회를 꼭 가야 한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며 수련회를 신성시하지만 정작 수련회와 주일 예배의 차이점이 뭔가? 기껏해야 일상으로부터 떨어진 공간이라는 점, 좀 더 기술적이고 '감동을 유발하기에 최적화된 찬양이 불러진다는 점. 말씀 시간이 길다는 점, 기도 시간이 길다는 점뿐이다. 이런 여타 차이점들이 복음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주일 예배 시간에도 충분히 전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복음이다. 수련회나 집회의 현장은 뜨거운 성령체험을 유도하는 음악과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장비로 점철된 곳이 아닌 복음을 선포하고, 그것을 타인과 나누는 토론과 담론의 장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복음에 대한 감화는 집회 현장의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가 아닌 성경을 읽고 복음에 대한 지식을 얻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단지 몇 시간 동안의 집회로 인해 마음에 감동이 찾아든다면 그것은 그저 단회적이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없어질 거짓 감동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일상으로 돌아가 수련회에서 받은 '감동'을 단 몇 주도 유지하지 못한 채 현실의 삶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기도회를 할 때 기도 반주를 깔아주는 것에 반대한다. 기도는 기도이고, 음악은 음악이다. 두 가지를 혼합해서 쓰는 순간 많은 문제가 생긴다.


나 또한 모태 신앙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교회 철야기도회나 수련회에 참석하고 누가 봐도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복음에 대한 진정한 감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늘 헷갈릴 뿐이었다. 집회 현장에 가면 뭔가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고(?) 눈물이 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데 정작 집에 오고 나면 그 감동은 증발해 버렸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집회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음악이 자아내는 거짓 감동을 '은혜'로 착각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기도하며 보낸 시간에 차라리 성경을 한 줄이라도 더 읽었으면, 마음속에 있는 복음에 대한 질문들을 조금이라도 더 나누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감동 중심 기도회는 한국 기독교 특유의 문화이다. 초대교회의 모습이나 유대인들에게서도 기도를 할 때 음악을 까는 것은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기도를 할 때 그저 침묵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진실된 감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음악은 필요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진실된 기도를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었다. 반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대규모의 집회나 철야 기도회와 같은 곳에서 극도로 음악에 의존하며 간단한 인도자의 멘트나 잠깐의 기도 속에서도 음악을 꼭 깐다. 심지어는 소규모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회를 할 때도 꼭 기도를 할 때는 피아노나 기타 반주를 깐다. 악기가 없을 때에는 휴대폰을 피아노 찬양 같은 것을 틀어 놓고 기도한다. 요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마치 배경음악 없이는 기도를 못하는 것 같다. 물이 없이는 수영을 못하는 것처럼, 진실되고 '뜨거운'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음악은 필수라고 여기는 듯하다.


게다가 찬양팀들은 그러한 서정적인 음악을 완성해 내기 위해 과하게 집착하고 때로는 팀원들을 혹사시키고 스트레스를 준다. 대형 교회의 경우 다수의 전공자들로 이루어진 찬양 팀들은 과도하게 음악적 완성에 집착하며 마치 그러한 음악적 완성도가 하나님의 기쁨에 비례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열성을 부린다. 그리고 가끔 보면 그들은 이 모든 것이 거짓된 감동을 주는 사기극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한다. "음, 이 잔잔한 곡은 눈물 쏟게 하는 곡이죠?, 분위기를 잡으려면 세컨드 피아노가 패드를 풍성하게 깔아주어야 해요." 얼마 전에 들은 말이다. 솔직히 역겨웠다. '눈물 쏟게 하는 곡' 이라고? 마치 찬양팀원들이 회중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기술을 구현하는 역할을 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대체 왜 아무도 이 사안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조함이다. 축축한 거짓 감동을 유발하는 악기는 필요 없다. 그저 침묵 속에서 진실하게 기도해야 한다. 수련회나 집회는 음악적 완성이나 장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소박하게라도 복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행 속에서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감각적 향연에 휩쓸리지 않고 진짜 복음에 진지하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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