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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음이 눕고 싶은 날이다.

by Amberin

오늘은 마음이 눕고 싶은 날이다.


이상하게 몸이 무겁고 마음이 가라앉는 날이 있다.

딱히 슬픈 일도 없고, 많이 피곤했던 것도 아닌데

머릿속이 뿌연 안개로 덮여있다.

멍하니 책상 위 한쪽 팔베개하고 눕고 싶은 날.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이런 날은 마음이 먼저 눕고 싶다고 말한다.

'잠깐, 나 좀 내려놓아 줄래?'

마치 오래 서 있었던 다리가 퉁퉁 부어

찌릿찌릿한 통증을 전하는 것처럼,

오래 버텨온 마음도 가만히 눕고 싶은 날이 있다.


나는 1993년 4월부터 지금까지

아이들 피아노 레슨을 해왔다.

어느덧 32년.

그 긴 시간 동안 나의 하루는 늘

건반 위에서 시작되어 건반 위에서 끝난다.


그 삶이 너무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한동안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시간을 원했는지조차 잊은 채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그 오랜 시간을

조용히 마무리하려 한다.


그런데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이 이상하게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조그마한 손이

처음 ‘도’를 찾던 날의 떨림이 떠오르고,

서툰 손끝으로 ‘작은 별’을 연주해 내던 벅찬 순간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도 했고,

콩쿠르 대기실에서 아이들보다 내가 더 긴장하던 날,

학교 대표로 뽑혔다며 전화를 걸어주던 아이의 밝은 목소리,

전공을 하고 싶다며 조심스레 마음을 털어놓던 고등학생,

공대생이 됐다며 인사 와서는

다시 피아노가 그리워진다고 말하던 학생.

성인이 된 친구가 찾아와서는

피아노 칠 때가 가장 재미있었다며

초등학생 때 연주했던 베토벤 소나타 곡을 아직도 외운다며 치던 남자아이까지

그 시간들은 내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

하나하나 선물이고 곧 나의 삶이 되었다.


누군가의 꿈과 함께 걸어온 소중한 기록이고 추억이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요즘,...

이상하게 피아노 소리가 아프게 들릴 때가 있다.

어느 날은 그 소리가 너무 아련해서,

그저 듣고만 있어도 눈물이 날 것 같고,

오늘 같은 날은 그 소리조차 듣기 싫어

피아노 뚜껑을 조용히 닫아버리고 싶어진다.

마음이 정말 오락가락한다.


익숙한 일을 그만두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겪는 걸까?

아니면 유난히 나는 이별에 약한 사람일까?...


오래 사랑한 것과 작별하는 일은,

그 사랑이 깊을수록 더 어려워지는 법인가 보다.


그래서 요즘은 음 하나, 프레이즈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지금 이 아이가 연주하는 이 곡은

내가 마지막으로 듣는 레슨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그 평범한 수업이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아 나를 붙잡는다.

그러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악보를 넘기며 웃고 있는

나 자신이 낯설고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러다 문득,

여행 예약 앱을 켜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발리, 뉴질랜드, 바르셀로나. 등,...

햇살이 부서지고 바다가 반짝이는 그곳들을

요즘 이상하리만큼 자주 검색하게 된다.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곳 어딘가에서

'나'라는 사람도 조용히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서도,

무언가로부터도 벗어나

마음껏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이

나에게도 필요했던 걸까?....


어쩌면 지금 이 시간은

다시 뛰기 위해 숨을 고르기 위한 준비 시간 일지도 모른다.


너무 오랫동안 반복해 온 리듬 속에서

이제는 조금 다른 호흡이 필요하다는

내면의 작은 신호 같은 것.


이제는 괜찮다고,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고

내 마음은 오래전부터 조용히 말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 조용한 마음의 목소리를 듣기로 했다.

누구에게 괜찮냐고 듣지 않고,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마음에게 속삭인다.

“그래, 오늘은 네가 누워도 괜찮아.”


자꾸 뭔가를 해야 할 것 같고,

의미 있는 하루를 만들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에서

내 마음을 살짝 내려놓아 주었다.


무언가 이루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눈을 반쯤 감고,

햇살 드는 창가를 바라보며 한쪽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그저 숨을 고르고, 숨을 내쉬고,...

시간이라는 이불을 덮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오늘을,

있는 그대로,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토닥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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