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불쏘시개

by 채신


할머니집이 마천루의 첨단 도시 속에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

구도심의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에서 살고 있는 친구의 자녀 A양(5세)은 최근 할머니집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고 한다. A양의 할머니집은 신도시에 있는 신축 대장 아파트다. 쾌적한 커뮤니티 시설과 깔끔한 조경이 돋보이는 단지 내 산책길에서 뛰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온화한 분위기가 너무도 좋은가 보다. 나 같아도 좋을 것 같다. (너희 할머니집에 나도 좀 같이 가면 안 되겠니..)


나의 할머니집은 구수한 장냄새와 순간 멈칫하게 되는 소똥 냄새가 다이내믹하게 코를 때리는 시골 마을의 소담한 집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솥을 걸어 밥을 해 먹는 클래식 중의 클래식 시스템을 갖춘 곳이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농부셨고 까맣고 마른 몸으로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도 우리가 어느 조상의 몇 대손 무슨 파인지를 몇 번이고 강조하시는 분이셨다.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파리 잡는 데에 심취해 있다가 손녀보다 손자만 반기는 평범한 아낙이었다.

조용한 시골집에서 기운 넘치는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별로 없다. 그나마 TV를 켜고 작년에 봤던 바로 그 머털도사로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고 하면, 어느새 어른들이 씨름으로 채널을 돌려버렸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마당으로 나와서 이끼나 벌레를 가지고 놀았다. 그것도 지치면 건넌방에 엎드려서 이런저런 글을 썼었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그 고요한 시간이 소중해진 것은 그 글에 욕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우리 반 어떤 짜증 나는 놈에 대한 욕, 엄마 욕, 아빠 욕, 동생 욕, 할머니 욕, 할아버지 욕, 동네사람 욕, 선생님 욕...... 쓰다 보면 더욱 분기탱천하여 술술 써졌다. 나는 그 노트를 문이 빡빡해서 잘 안 열리는 찬장 안쪽 구석에 박아 놓고, 명절마다 찾았다. 어차피 할아버지는 눈이 안 좋으시고 할머니는 글을 몰라서 그 찬장이 가장 안전했다. 욕 쓰는 은밀한 즐거움을 알아버린 못 된 어린이였다.


그 노트가 떠오른 것은 몇 년 전 할머니의 장례식 장에서였다. 아흔을 훌쩍 넘긴 사람의 장례식은 생각보다 밝은 분위기라서 충격적이었다. 그런 밝은 분위기에 편승하는 척하면서도 순간순간 무너지는 아빠와 고모들을 보고 있으니 또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한가롭게 뭘 생각할 틈은 없이 문상객들이 밀려 들어왔다. 장례식의 시스템은 상주들을 위로하는 하나의 방식인 거였다.


할머니의 오랜 친구 되시는 분이 장례식에 오셨다. 우정의 세월이 70년이 넘었다는 이야기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유독 나를 보시며 '이 아이가 그 둘째 아들네 딸내미인가?' 하며 관심을 보이셨다. 나는 사실 그 할머니를 잘 모른다. 타지 가서 공부하느라 욕본다며, 그리 힘들어서 어찌하냐며 자꾸 나를 위로하시는데 나는 다른 누군가와 착각하시는 거겠지 하면서도 마냥 듣고만 있었다. 식사를 다 하시고 이 동네 인싸답게 이 사람 저 사람과 인사까지 다 나누시고 어둑해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시면서 또 나를 찾으신다 하여 인사드리러 갔다.


"자네가 쓴 일지를 보느냐고 느 할매가 다 늙어서 한글공부를 그리 열심히 했다"


뒷골이 갑자기 땡겨왔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왔다. 저 할머니도 또 그 옆의 할머니도 어쩐지 나를 보시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죄를 짓고도 엉성하게 방치한 내 잘못이다. 장지까지 갔다가 나는 할머니집도 마지막으로 보고 가겠다며 누구보다도 빠르게 범죄현장으로 찾아갔다. 그 노트는 찬장에도 농에도 서랍에도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할머니의 한글공부방이나, 아니면 아예 만천하에 알려져서 훤하게 오픈된 채로 뒹굴고 있겠구나 망연자실했다.

부엌에서 찬물을 사발로 들이키고 나오는데, 아궁이 옆에서 플라스틱 스프링을 발견했다. 내 노트의 일부였던 바로 그 스프링! 아궁이안을 보니 회색 재가 한가득이다. 재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를 않았다. 모든 욕들을 깨끗이 걷어 가 버린 뒤였다.

갑자기 귀가 좀 먹먹해져서 괜히 솥뚜껑만 하염없이 만지작 거렸다. 엄마와 아빠가 거기서 뭐 하냐며, 손녀 앞으로 남긴 재산이라도 찾는 거냐며 아마 없을걸 하며 농담을 하셨다.


재미도 없고 욕만 가득했던 내 글을 공부까지 하시며 읽어낸 유일한 독자이자, 잊지 않고 손녀의 죄를 깨끗이 태워놓고 가신 우리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








keyword
이전 04화어린이들의 체육선생은 전파를 타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