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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민족 DNA:도전과 응전

제1장 민족 DNA의 탄생과 분화

by 한시을

3화: 유교 수용과 민족적 분기점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가 편안하고, 백성이 즐거워야 나라가 즐거우며, 백성이 부유해야 나라가 부유하다" - 세종대왕, 「세종실록」 12년(1430)


기원전 6세기, 중국 춘추시대. 공자라는 한 사상가가 "인(仁)"과 "예(禮)"를 강조하는 새로운 철학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2,000년에 걸쳐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죠.


그런데 또 한 번,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같은 공자의 가르침이 조선에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 일본에서는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도구", 중국에서는 "중화질서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발전한 거예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답은 이전과 같습니다. 각국의 민족 DNA가 유교를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조선: 홍익인간과 만난 성리학


조선 왕조가 성리학을 받아들인 방식은 정말 독특했습니다. 성리학의 핵심인 "수기치인(修己治人)" - 자신을 닦아서 남을 다스린다는 개념을 "애민(愛民)" 정신으로 해석한 거예요.


세종대왕을 보세요. 그는 「세종실록」 곳곳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임금은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 백성이 없다면 임금이 누구를 다스리겠는가?"


이건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어요. 중국에서 유교는 황제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이론이었는데, 조선에서는 오히려 왕이 백성을 섬겨야 한다는 논리로 바뀐 겁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왕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글자를 만들어 준다? 이런 발상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습니다.


정조는 더 구체적으로 실천했습니다. 화성을 건설할 때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신도시"라고 명시했어요. 왕궁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도시를 만든 거죠.


▌[당시의 목소리]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而衆星共之" (덕으로 정치를 하면 북극성처럼 제자리에 있어도 모든 별이 둘러싼다) - 「논어」를 인용한 세종의 애민 정치관


일본: 막부 체제를 정당화한 주자학


일본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도쿠가와 막부(1603-1868)가 성리학을 받아들인 이유는 철저한 신분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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