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3.1 운동은 1919년에 일어났어. 맞지?
미 : 응.
유 : 어? 저기 지나가는 차 종의 이름이 뭔지 알아?
미 : 아니.
유 : 그래? 그러면 특정한 도형을 이등변삼각형으로만 분할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
미 : ...
인간의 논리적 사고의 형태는 간단히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특정한 말이나 사건을 접하였을 때,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경험'을 필요로 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경험 명제'와 '분석 명제'로 분류할 수 있다.
경험 명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기 위한 경험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천안 버스 터미널 근처의 OO라는 카페 가봤어?"라는 질문에 "어"라는 답을 하기 위해서는 천안 버스 터미널 근처의 OO라는 카페에 가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중 가장 큰 그림이 뭔지 알아?"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 중 가장 큰 그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처럼 경험 명제는 그것을 접하자마자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답변을 즉시 낼 수 있다. 하지만 분석 명제는 그렇지 않다. 분석 명제를 접하였을 때에는 수리적인 사고를 필수적으로 거쳐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경험 명제와의 핵심적인 차이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한 경험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리적인 사고가 그것을 대체한다.
"5 빼기 3은 뭐야?"라는 질문을 당신에게 해본다. 당신은 지금 마음속으로 답변하였다. 너무나 쉽고 당연한 질문이다. 어라, 바로 답변이 나왔으니 이는 경험 명제에 속하지 않는가? 그치만 생각해보자. 5 빼기 3이 몇인지를 우리가 과거에 계산하지 않았다면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없었을까?
이번에는 "723 곱하기 2311은 몇이야?"라는 질문을 해보겠다. 바로 답변 가능한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몰라"라고 바로 답변했을 수도 있겠다. 이 역시 바로 답변이 나왔기 때문에 경험 명제 아닌가? 잘 생각해보자. 바로 답변이 나오지 않았을 뿐, 아주 긴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당신에게 "역대 아이슬란드 축구 국가대표 중 최다 득점자가 누구야?"라는 질문을 해보겠다. 이 질문에 당신이 "모른다"라고 답변했다 치자. 그러면 10분 후에 당신은 답을 말할 수 있는가? 3시간 후에는? 일주일 후에는? 4년 뒤에는?
이제 우리는 경험 명제와 분석 명제의 확실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경험 명제는 그 문장 자체적으로 술어를 낼 수 없지만, 분석 명제는 술어를 낼 수 있다. "3.1 운동이 언제 일어났어?"라는 문장을 봤을 때, 이 문장을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1919년"이라는 답변을 낼 수가 없다. "3.1 운동은 1930년에 일어났어"가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3.1 운동은 1919년에 일어났어"라는 참인 명제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분석 명제는 그 문장 자체로 참과 거짓을 판가름할 수 있다. "112개의 초콜릿을 네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주려면 몇 개씩 나누어줄 수 있어?"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 굳이 다른 참인 명제를 불러오지 않더라도 문장 자체로 "28개"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내가 굳이 초콜릿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준 경험이 없더라도 바로 올바르게 나누어줄 수 있듯이 말이다.
분석 명제를 듣고 접하는 것의 목적은 우리가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도록 함에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서로와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접하며 그 능력이 길러짐은 물론 강제로 그것을 담당하는 뇌의 중추를 일깨우게 함으로써 분석적 사고를 기르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수학'을 통해 그 능력을 길러왔다.
오랫동안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하기 싫은, 골치 아픈, 시간만 흐를 뿐인, 설령 해결되더라도 의미가 남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라곤 전혀 없는. 사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과정 속에서 필히 느낄 수밖에 없는 채찍질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분석적 사고를 담당하는 뇌의 중추가 숫자를 접할 때 다가오는 전기적 신호 자극을 받아도 그것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타고난 맷집을 지니도록 성장하는 유전자를 보유했을 뿐이다. 끊임없이 수학을 연구하고 지금의 이런 상상할 수 없는 크기로 만들고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거대한 즐거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즐거움의 중심은 수를 셈에도, 앞날을 예측하는 것에도 아닌 크기와 모양을 다루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