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Fixation

우리나라 수험생은 정말 사고(思考)하는가?

by 윤우

필자는 일본 유학을 위해, EJU시험(Examination of Japanese University Admission for International Students)을 공부했다. EJU는 일본어 독해/청해/기술, 종합과목(사회탐구), 수학으로 이루어진 일본 유학생을 위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얼마나 어려워봤자야, 라고 생각했었다. 수능과 외국어시험을 비교하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고, 초기에는 ‘일본에서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외딴 고민에 잠기는 어린 사고였다.


사고였다. 생각보다 어렵다. 수능보다 범위가 훨씬 넓고 지엽적이며 일본어는 파고들수록 어려워지는 언어다. 그러나 진짜 어려움과 차이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생각의 ‘방식’이었다.


최근 수능 국어의 출제 문제를 살펴보았다. 가장 많이 출제된 문장은 바로, ‘다음 글을 읽고 물음을 답하시오‘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할거다. ‘물음인 선지를 봐야 뭐가 정답인지 알수있으니, 그렇게 지도하는게 당연한거 아닌가?’라고 할수 있겠다.


그러나, EJU를 준비했던 내가 보기엔, 조금 어이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목적은 대학입학의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판별기능도 있지만, 본질은 학생의 사고능력 판단이다. 사고능력이 없다면,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해도 정말 그런가에 대한 것은 알 수 없다.


요점은, 학생이 지문에 관한 참된 이해를 했는지를 물어보는게 아니라, 바른 선지의 사고방식을 고르게 하는데 혈안이 되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2025 수능 국어의 21번 선지를 보면, ‘정선이 황상에게 올린 상소에서, 대원수와 가장으로서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가정 안팎의 사건에 남주인공이 두루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군’과 같은, 이미 선지가 지문에 대한 사고를 끝냈다. 비단 학생이 해야 할 일은 이 선지의 말이 맞는가에 대한 판단질만 하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지문의 요지, 지문의 저자가 하고싶은 말과 주장, 주장에 대한 자기 자신만의 요약, 나아가 재해석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이 진정 글을 읽고 해야하는 ‘사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능 국어는 이 사고 흐름을 완전히 막아놓았다.


일본은, EJU는 얼마나 다를까. EJU 독해에서 가장 많이 출제된 문제는 바로, ‘필자가 가장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筆者が最も言いたいことは何か)’이다. 선지도 ‘필자는 이러한 생각으로 이러한 감정을 품고 주장을 하는군‘의 형식이 아닌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관찰자를 현상으로부터 떨어뜨리는 점이다(科学では現象と観察者を切れ離れること)‘와 같은 이 글의 요지만 남겨놓은 채, 학생이 정말 이 글에 대해 사고하고 재해석했다면 수능 4등급이든, 1등급이든, 차이가 없고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선지를 설계하였다.


이것이 바로, 킬러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수능의 킬러문제라는건 지금 봐도 넌저리가 난다. 스킬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사고방식을 막아놓고, 하고싶은대로 사고를 하라는 것 같다. 마치 작은 방에 가둬놓고, 제자리에서 될때까지 뛰라는 것 같다. 학생은 열심히 뛰지만, 여전히 같은 방이다. 이미 정해둔 게 있으면서, 자유롭게 사고하라는 것이다. 답정너같은 연인과 대화하는 것 같다.


이것이, 수능의 가장 큰 문제이고, 빨리빨리 문화와같은 고질적인 문제가 시작된 한국의 교육시스템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해외인 일본이라고 찬양하는게 아니다. 토플도 비슷하다.


수능을 봐왔던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수능을 잘본 사람은 그것대로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사고의 본질과는 조금 동떨어진 시험을 잘 본거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끝없는 자기/타인 비판과 고정된 관념속에서 응축적으로 살아간다. 응축되어 응고된 사고나 감정은, 썩고 부패되면 내가 아닌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리는 삶이 되기 쉽다. 그런 삶이었던 (모두가 아닌 보편적으로) 중년층 세대였고,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더 심해졌고, 강력해졌다.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더 심해졌고, 이젠 AI와 같이 사고를 대신하기까지 해준다.


한국은 나만의 사고라는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가 옅어져가고 있다. ‘나’라고 해서 이기적이고 개인주의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조차도 수능의 속임수다. ‘나’라는 존재를 매우 강렬하고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사회가 바라보는 ‘나‘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필요없다. 누가 날 어떻게 바라보는 가에 관해선 일정 부분 법과 에티켓만 지키면, 정말 어떻게 해서든 상관없다.


그렇게만 잘 하고 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교실에서 보는 아이들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의견 하나 때문에 모두가 불편해하고 멸시한다.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고, 심지어 비판도 안한다. 의견이 끝나면 교실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의 웅- 하는 침묵이 이어질 뿐이다.


실제 중학교 시절, 미국에서 유학을 와서, 매 수업마다 질문을 해서 안좋은 시선를 받던 친구가 있었다.

선생님들도 골치아파한다. 반면 한국인은? 심지어 선생님이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 아이를 위해 만든게 학교이지만,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집단적 이익을 우선하는 경우도 있기에 예외적인 때는 있지만, 적어도 30명 내지, 인수가 더 줄어들고 있는 한 반내에서는 자유롭게 의견 표출할 수 있어야 하는것 아닐까.


거기서 한국과 세계의 격차는 벌어졌다. 더이상 학생은 필요없고, 돈 잘버는 의사, 취업 잘되는 컴공과만 바라보는게 한국 학생이다. 교육청은 ‘나’라는 존재를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그냥 ‘영재’를 발굴하고 싶은거다.


물론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태어난 ‘영재’는 국가 차원에서 엄청난 대우를 받아야 하는건 맞지만, ‘영재’만 발굴하기에는, 땅 깊은 곳에서 빛나는 더 많은 광물과 자원을 빛이 바래는 대로 방치하고 내버려두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