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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와 진실 사이에서

관계의 윤리와 작은 실천에 대하여

by 신아르케

진실함은 분명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묻게 된다. ‘항상 자신의 감정에 진실한 것’이 과연 언제나 덕이 될 수 있을까? 순간 느껴지는 감정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 진실함이라면, 그것이 관계 속에서 언제나 선한 결과를 만들어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윤리와 도덕의 시작점은 결국 관계성이다. 우주에 오직 나 혼자만 존재한다고 상상해 보자. 사랑할 대상도, 미워할 대상도 없고, 속일 상대도, 용서할 상대도 없다면,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윤리 판단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라는 장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내가 가진 불편함이나 싫어함, 경계심 같은 부정적 감정을 여과 없이 표정과 목소리에 드러내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나에게도 좋은가?

부정적 감정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몸도 경직되고, 집중력도 떨어지고, 마음까지 소란스러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억압하며 사는 것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감정을 왜곡하거나 끝없이 눌러 담는 삶은 결국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없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성숙한 인격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배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비호감인 사람조차 포용하고 사랑하려는 선한 의지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내버려 두면 선보다 악한 쪽으로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면까지 완전히 진실되기 어렵다면, 최소한 외적인 표현이라도 선하게 가꾸어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이것이 상대를 속이기 위한 기만이나 위선과는 다르다. 나는 단지 내 안의 더 나은 의지와 가치에 충실하기 위한 훈련으로서 외적 표현을 다듬어 보려는 것이다. 진실성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예의 바르고 온화한 태도를 실천하는 것이 관계 속에서 분명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작은 ‘선’이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타인의 외적 표현에서 많은 기쁨을 얻는다.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배우 차은우나 박보검의 미소를 떠올려보자. 많은 이들이 그들의 미소만 보아도 행복해한다. 그들의 내적 세계가 어떤지 몰라도, 그들의 얼굴과 미소 자체가 타인의 정서에 선한 영향을 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유명 배우처럼 잘생길 수는 없지만, 표정·눈빛·미소·목소리 같은 ‘통제 가능한 영역’만으로도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의식적으로 좋은 미소를 지으려 하고, 목소리도 가능한 한 중후하고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다소 인위적으로 보일지라도, 상대에게 기쁨을 준다면 그것은 분명 선에 속한다.

최근 심리학도 이러한 방향성을 뒷받침한다. 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 , 예컨대 억지로라도 웃으면 실제로 행복감이 증가한다는 점은 선한 행위가 선한 마음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나는 이러한 가능성을 믿고 삶에 적용해 보았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놀라웠다. 관계가 이전보다 부드러워지고, 감정 에너지가 덜 소모되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작은 미소’와 ‘부드러운 말투’라는 사소한 습관이 내 일상과 인간관계, 그리고 나 자신에게까지 유익을 가져왔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완전한 진실성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선한 방향을 향한 작은 실천은 분명 가치 있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미소와 말투 하나하나를 나의 내면이 닿고자 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밀어 올려 본다.
그 작은 움직임이 언젠가 진짜 마음과 만나는 날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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