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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시적 은유로 말하는가?

by 신아르케

가끔 이런 의문이 든다.

“왜 인간은 굳이 시적 은유와 비유로 말할까?”

직설적으로 말하면 오해할 여지가 줄고, 의사소통도 훨씬 분명해질 텐데, 왜 우리는 때때로 읽는 사람에게 더 많은 지력과 마음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글을 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첫 번째 이유를 ‘말할 수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진실을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고, 정의를 말하고 싶지만 위험하며, 있는 그대로 비판하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가 닥칠 수 있는 시대와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우회적 언어, 즉 은유와 비유를 선택한다.

은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뜻이 드러나지 않는다.

표현 자체가 여러 층의 의미를 품기 때문에, 언제든지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부정할 여지도 있다.

억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언어적 ‘숨결’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은유의 역할은 단지 억압을 피하기 위한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성경에서 예수님도 종종 비유로 말씀하셨다.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진리의 깊이를 온전히 담을 수 없어 비유라는 우회로를 사용하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들을 귀 있는 자들만 듣게 하시기 위한 방식이었다.

진리는 언제나 모든 이가 단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때로는 비유라는 간접적 언어를 통해서만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 수 있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신의 가장 은밀한 감정과 생각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할 때, 그것을 시적 언어로 승화시켜 표현한다.

슬픔, 질투, 사랑, 고독, 존재의 고통 같은 감정들은 직설적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지나치게 평평해지고 무거워지기 쉽다.

그러나 시적 은유는 감정의 결을 훼손하지 않고, 그 감정이 가진 빛과 그림자를 그대로 품은 채 타인에게 건넬 수 있다.


나는 칼릴 지브란의 산문시들을 통해 이런 은유의 힘을 배웠다.

그의 글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마음, 죄성과 상처를 시적 이미지로 풀어내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진실을 부드럽지만 힘 있게 건넨다.

예를 들어 지브란은 한여름의 개구리 울음을 인간의 내면 깊숙한 절망과 불안을 비유하여 설명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소란스럽고 거친 행동들 뒤에는, 사실 말로 다 드러내기 어려운 상처와 고통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한 번에 깨닫게 한다.


인생의 깊은 면모를 이해하게 된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시끄럽고 과장된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말하지 못한 두려움, 외로움, 불안이 자리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비난하기보다, 연민과 위로의 눈길을 건네게 된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당신 내면의 절규와 상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공감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지브란의 글이 우리 마음을 울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그의 은유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하며, 우리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어 준다.


결국 인간이 시적 은유를 사용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억압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진리를 더 깊이 전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며,

직접 말하기 어려운 마음과 고통을 아름다운 형태로 건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서로의 내면을 더 깊이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서이다.


은유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게 하는 언어이며,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게 하는 창이다.

그 창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속을 들여다보고,

비로소 사람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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