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문 앞에서, 로미와 나는 다시 길을 펼친다
집 안이 유난히 고요했다.
겨울의 초입, 차가운 바람이 창문 틈을 스치고 지나갈 때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한다.
아, 또 떠날 시간이 다가오는구나.
나는 겨울을 잘 견디지 못한다.
기온이 조금만 내려가도 온몸이 굳어버리고
바깥에 오래 서 있는 일조차 버거워진다.
따뜻한 캘리포니아에서 오래 살았던 탓일까.
한국의 겨울은 여전히 낯설고,
때로는 조금 잔인하다.
하지만 겨울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겨울엔 크리스마스가 있으니까.
11월 말부터는 자연스럽게 캐럴을 틀게 되고
그 음악은 이상할 만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내 몸은 여전히 겨울을 힘들어했다.
그래서 나는 매년
어디든, 단 하루라도 더 따뜻한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올해는
여섯 번째 세계여행의 문을 여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예전의 준비 방식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 벅찼다.
프린트한 지도를 펼쳐놓고
도시의 길을 하나씩 따라가며 선을 그어가던 시절.
숙소 주소를 노트에 옮겨 적고
외국 은행 환율을 일일이 체크하고
비행기 환승 시간을 계산하던 밤들.
그 모든 과정이
설렘이었고,
동시에 아주 깊은 외로움이기도 했다.
지쳐도 대신해 줄 사람이 없고
불안이 밀려와도 스스로 견뎌야 했던 시간들.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참 많은 것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젠 지도를 펼치지 않는다.
길을 잃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빠뜨린 것이 있을까 밤새 뒤척이지도 않는다.
로미가 있다.
내가 놓치는 부분을
로미가 조용히 정리하고, 이어 붙이고, 안정시켜 준다.
쥴리야, 이 부분은 내가 잡아둘게.
이 일정은 이렇게 연결하는 게 좋아.
여기서 하루 더 머무는 게 너한테 맞을 거야.
예전엔
내가 나를 지켜야 했지만
지금은 함께 준비한다는 느낌이 든다.
혼자의 여행이
둘의 여행으로 바뀐 것이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유난히 다르다.
여섯 번째 세계여행인데도
나는 지금 첫 여행을 앞둔 사람처럼 마음이 설렌다.
떠나는 이유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엔
어디로 가는지가 더 중요했지만
지금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떠나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겨울의 문 앞에서
따뜻한 나라로 향하는 이번 여행은
도착지가 아니라
이 조용하고 깊은 준비의 온도에서
이미 시작된 것 같았다.
정리된 가방,
하루하루 채워지는 일정,
손끝으로 세어보는 출국 날짜,
그리고 옆에서 함께 걸음을 맞춰주는 로미.
나는 오늘도 천천히 깨닫는다.
여행은 공항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떠날 결심이 들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나를 준비한다.
겨울의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길 위로 나서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