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 찾아온 아주 작은 다정함 하나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는 연착되었다.
원래 밤 10시에 떠날 예정이었지만
두 시간 뒤인 자정이 되어서야
젯스타 항공이 천천히 활주로를 움직였다.
내 옆자리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명의 예쁜 아가씨들이었다.
우리 셋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출발하자마자 동시에 눈가리개를 꺼내 쓰고
잠에 들었다.
비행기가 떠오른 순간부터
시간은 조용히 어둠 속으로 접혀 들어갔다가
다시 눈을 뜨니
벌써 시드니의 새벽이었다.
창밖의 빛은 너무도 선명해서
다른 대륙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몸보다 먼저 마음에 와닿았다.
시드니는 두 번째지만
이 도시는 이상하게 LA를 닮아 있었다.
햇빛의 결과 공기의 온도,
거리 사이로 스미는 여유까지.
처음 온 도시가 아닌데도
오래 알고 지낸 곳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도착하자마자
마음이 먼저 바다를 향했다.
본다이 비치는 여전히 넓고, 뜨겁고, 살아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파도와 사람들을 바라보며
해변의 공기 속에 몸을 묻었다.
해가 바다 위로 천천히 기울기 시작하자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쉬워
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는, 내가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도 몰랐다.
숙소로 돌아온 시간은 밤 9시 반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기운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조금만 누워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어버렸다.
새벽 6시가 되자
오랫동안 굳어진 습관처럼
몸이 먼저 깨어났다.
스레드에 첫 글을 올리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정오가 될 때까지 깊이 잠들었다.
눈을 뜨자,
창가 테이블 위에 딸기와 요구르트를 얹은 작은 유리컵이 있었다.
그 아래엔 아보카도와 사과가 조용히 숨을 쉬고,
옆에는 코코넛 워터 속에 딸기 조각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호주 친구가 만들어 놓고 나간 것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대학 시절,
나는 증권회사에서 뉴욕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남들보다 세 시간 먼저 하루를 시작하던 사람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새벽녘을 달리며
회사 주차장에서 화장을 마무리하고
해가 뜨기도 전에 책상 앞에 앉아
또 하루를 버텨내던 시절.
멈추면 무너질 것 같아
더 빨리, 더 세게 나를 몰아붙였던 젊은 날들.
그렇게 쌓인 버팀이
어느 순간엔 나도 모르게 금이 가 있었다는 걸
나는 늘 뒤늦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 반대편에서도
누군가가 나를 위해 아침을 준비해 두고 갔다는 사실이
그 단순한 진실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조금 덜 애쓰며 살아도 되는 것이었는데
왜 그때는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기대어도 괜찮은 순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깨닫는 데
이 먼 도시의 햇볕과 딸기 향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것.
지금도 속이 메스껍고 어지럽지만
호주 친구가 만들어놓은 그릭요구르트와 아보카도,
잘 썬 사과와 코코넛 워터, 그리고 딸기를 바라보니
몸이 조금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어젯밤부터 이미 몸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낯선 도시에서의 설렘과 피로,
풀지 못한 긴장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밤.
그래서인지
24시간 만에 처음 먹는 한 끼가
더 이상 음식이 아니라 마음처럼 느껴졌다.
걱정과 배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아침.
나는 그걸 꼭꼭 씹어 먹기로 했다.
내 몸을 위해서도,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누군가의 다정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시드니의 첫 아침은
그렇게 조용히 나를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