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때는 부지런하지
아침 8시 반. 일어나자마자 페퍼민트 차를 마시며 오늘은 뭘 먹을까 천천히 생각했다.
평일엔 늘 효율성을 위해 가스레인지를 피하고, 빵처럼 간단한 걸 선호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예외다. 감자전을 만들기로 했다.
처음이라 레시피를 찾아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감으로 했다.
감자를 얇게 썰고, 부침가루에 고추를 넣어 색도 맛도 살짝 매콤하게.
감자와 기름이 만나면 실패할 리 없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고, 다행히 그건 맞았다.
따뜻한 밥 한 공기와 바삭한 감자전, 완벽한 아침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청소, 빨래, 설거지를 하며 집을 정리하는 동안
어제 주문했던 오설록 차가 도착했다.
기쁜 마음으로 물을 끓이고 티백을 넣었는데,
기대와 달리 흉측한 바닐라 향이 집안을 뒤덮었다.
나는 무화과 초콜릿 향을 골랐는데,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인가.
꿀과 우유를 넣어 밀크티로 만들어봤지만 그마저도 실패.
결국 성질이 나서 티백을 베이킹 재료로 쓰기로 했다.
그러다 갑자기 파스타가 먹고 싶어졌다.
바질 페스토에 우유, 치즈, 고추, 소금을 넣고 즉흥적으로 만들었다.
소금이 살짝 과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무계획하게 만든 음식이 의외로 괜찮을 때, 괜히 뿌듯하다.
오늘은 계획보다 감으로 흘러가는 날이다.
그 다음엔 레이디 그레이 차를 마시며
그 흉측한 바닐라 향의 티백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머핀으로 만들어버리기로 했다.
찻잎을 반죽에 섞어 오븐에 넣었더니
예상보다 훨씬 향긋한 머핀이 구워졌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와 함께 먹으니
오늘 하루의 티백 선정 실패가 한순간에 용서되는 기분이었다.
다음엔 초콜릿칩을 조금 넣어도 좋겠다.
집을 정리하다가 간식이 당겨 오이와 리코타 치즈를 꺼냈다.
후추를 살짝 뿌리고 꿀을 곁들이니 의외로 잘 어울렸다.
루이보스 오렌지 차를 마시며
오늘 하루가 참 많이 먹고 마시며 흘러갔다는 걸 실감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버릴 것들을 정리하고 향초를 켰다.
조명을 낮추고 영화를 틀자 집이 포근해졌다.
영상이 잔잔해서 그런지 괜히 몸을 움직이고 싶어져서
결국 고기를 구웠다.
소고기와 흰밥, 깍두기.
실패할 수 없는 조합으로 완벽한 저녁을 마무리했다.
마무리하듯 보리차를 듬뿍 따라 마셨다.
하루 종일 차를 마셨지만, 이상하게 이 마지막 잔이 가장 편안했다.
소파에 앉아, 따뜻한 찻잔을 들고,
일요일이 천천히 식어가는 걸 바라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