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겨울방학,
나는 본격적으로 정물 수채화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막 입시반으로 올라와 얼어 있는 15명은 학원 안 정물대 주변에 빙 둘러앉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등장한 우리 학원 단골 정물 ‘얼갈이배추’.
시작 전에 꼭 선생님께서 먼저 시범을 보여주시는데,
평소 무뚝뚝하고 장난기가 전혀 없던 선생님은 퀴즈를 내셨다.
“얼갈이는 무슨 색일까?”
"초록색이요!" — 땡.
"연두색이요?" — 땡.
"하얀색..?" — 땡.
잠깐의 침묵 뒤, 선생님이 진지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얼갈이는 얼갈이 색이지."
순식간에 김이 팍 빠진 15명의 어린 얼굴들.
'뭐야 뭐야...' 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입시 예비반이었던 초등학교 5학년때,
그때 장난기 없고 차가울 만큼 차근차근 팩폭을 잘 날려 우아한 부원장 선생님께서
그림 잘 그리는 비법을 알려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비법도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바로 '정물과 대화하기'.
정물과 대화라니?
눈을 마주치고 눈싸움하듯 뚫어져라 바라보며
속으로 그 정물과 대화도 해보라는 것.
지금도 종종 정물과 대화한다고 하셨다.
그 말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누구보다 차갑고 도도한 부원장 선생님이 그렇게 서정적인 말을 하셔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실제로 내 손으로 글을 써보는 것보다 먼저 자신이 보는 사물이나 사상을 세세하게 관찰하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 아닐까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어찌 됐건 찬찬히 주의 깊게 관찰한다...”
그는 재빠른 결론을 추출하는 게 아닌 재료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십시오ㅡ”
이 말을 읽는 순간, ‘얼갈이 색’ 퀴즈가 생각났다.
입시미술에는 흔히 ‘미술학원 용어’가 있다.
“잘 그렸네” 보다 “이건 보고 그렸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아무리 지겹도록 본 정물이라도 주의 깊게 바라보면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