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Bird Lives! 한 마리 새, 재즈 속을 날다

예술가인가, 연예인인가-찰리 파커의 굴레.

by 백현선

찰리 파커의 별명 ‘버드(Bird)’는 단순한 애칭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남긴 음악과 삶, 그리고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의미 작용들의 응축된 상징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비평가 랄프 엘리슨은 로버트 레이스너의 평전 Bird: The Legend of Charlie Parker를 바탕으로 이 별명에 담긴 정체성의 복잡성을 깊이 있게 해석한다.


엘리슨에 따르면, 찰리 파커는 “Bird”였고, 동시에 “Poor Robin”이었다. 새는 자유의 상징이지만, ‘Yardbird’는 한편으론 감옥 새(jailbird)의 함축을 지닌다. 파커는 울타리에 갇힌 새처럼 자유를 갈망했지만, 그 자유는 언제나 상징적 프레임 안에서 소비되었다. 그가 죽은 후에도 뉴욕 곳곳에 적힌 낙서 하나 “Bird Lives!” 는 그가 단순한 뮤지션을 넘어, 살아 있는 유령이자 문화적 환영으로 남았음을 말해준다.


엘리슨은 파커의 정체성을 다양한 새에 빗댄다. 금빛 깃털의 골드핀치(Goldfinch)는 중세 유럽 회화에서 희생과 구원을 상징했지만, 소리의 측면에선 찰리 파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대신 엘리슨이 주목한 것은 ‘모킹버드’다. 다양한 소리를 모방하고, 밤에도 노래하는 이 새는 파커의 연주 스타일 (긴 프레이징, 빠른 속도, 다양한 뉘앙스를 즉석에서 엮어내는 유연함)과 절묘하게 맞물린다. 파커는 다른 연주자의 스타일을 자유롭게 흡수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자기 식으로 재탄생시켰다.


하지만 모방은 곧 경계의 문제다. 파커는 루이 암스트롱의 연예인적 정체성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실제로 비밥은 스윙 시대의 오락성과 상업성을 거부한 음악적 혁명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파커 자신은 또 다른 형태의 연예인이 되고 만다. 그를 향한 백인 비트니크들의 열광은 그가 “최고의 힙스터”, “최고의 마약 중독자”라는 이중의 이미지를 짊어지게 했다.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청중이 누구인지, 그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엘리슨은 이 지점에서 결정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찰리 파커는 과연 흑인 청중에게도 의미 있는 존재였을까? 아트 블레이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그를 들어본 적도 없다.” 엘리슨은 이 냉혹한 문장을 통해, 파커라는 상징이 실제 흑인 공동체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지를 비추어낸다. 문화적 영웅으로서의 찰리 파커는, 그가 원했던 ‘자유’의 구현이 아니라, 백인 청중의 감각 안에서 구축된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커는 여전히 재즈 혁명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그는 자유의 음악을 위해 자기 자신을 불태웠고, 그로 인해 다시는 닿을 수 없는 어떤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 엘리슨이 말한 것처럼, 그는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가엾은 로빈(Poor Robin)“이다. ‘Bird lives’라는 구절은 그래서 단순한 헌사가 아니라, 질문이다. 그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으며, 우리는 그를 어떤 방식으로 듣고 있는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