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많은 예술가의 벨기에 정착기
| 헤르미온느의 성찰 |
나는 대학 시절 시간을 테트리스처럼 쪼개서 아주 알차게 썼다. 그래서 내 별명은 자칭 타칭 헤르미온느였다. 1년에 300 시간의 봉사 시간을 이수할 만큼 몰두해서 교육 봉사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고, 동시에 음악으로 먹기 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광고홍보학 복수 전공도 했다. 경쟁률 높은 대외활동을 동시에 여러 개 했는데, 나름 성과도 좋아서 만드는 교육 프로그램마다 상을 받았다. 너무 바빠서 가족 행사, 친구 생일파티도 불참하기 일쑤였던 나에게 아빠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남들 위해 봉사할 생각하기 전에, 네 주변 사람들, 가족한테나 봉사해!” 나는 참 이기적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온전히 ’ 교원자격증‘이라는 부모님의 목표와 ’ 유학‘이라는 나의 목표,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몰입했다. 공연장 아르바이트, 교육 대학원 수업, 풀타임 조교, 독일어학원에다가 유학 준비까지 병행했다. 새벽 6시에 나가서 밤 12시에 들어왔다. 이렇게 살아야만 성장하는 줄 알았다. 뭐 표면적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어학 점수도 땄고, 조교 하면서 대학원도 거의 공짜로 다니고,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유학 원서도 넣고, 레슨도 받고. 원하는 것을 이뤄 나갔지만, 음악에만 몰입하고 싶었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원 졸업 한 학기를 남겨두고, 2018년 12월에 돌연 듯 독일행 편도 비행기표를 샀고, 급하게 준비한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도피하듯 유학을 나왔다.
12월 31일. 나의 유럽 여정은 독일에서 시작됐다. 나는 이때까지 내가 원하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참 어리석었다. 행복했던 내 영광의 시절은 여기에서 막을 내렸다.
| 루저가 된 헤르미온느 |
나의 자랑, 과거의 영광은 유럽에서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0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생존 능력도 0인 나의 유학 생활은 정말 파란만장했다. 독일 처음 나와서 1년은 요리도 못해서 매일 라면만 먹고, 하루는 아빠 카드를 썼는데, 카드 소유주 이름과 내 이름이 다르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연행되어 간 적도 있었다. 또 팬데믹, 독일에서의 여러 번의 입시 실패, 벨기에로 넘어와서 겨우 입학한 학교에서의 퇴학, 회피형인 첫 남자친구로 인한 실연을 겪으면서도 그럭저럭 유럽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이때부터 불면을 이유로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저절로 피부는 푸석해지고, 머리는 내가 직접 가위로 싹둑 잘라 항상 묶고 다녔다. 한국어 수업을 시작하고 나서는 술과 야식으로 10kg 이상이 쪘다. 바빠서 한국에도 2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했다. 가족들과도 거의 한 달에 한 번 통화했는데, 내가 자주 하는 말은 “나 너무 불행해. 나는 루저야.”였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내미가 통화할 때마다 이런 말을 하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하지만 그럴 거면 한국에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말씀에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 고양이는 위대하다! |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을 살다 보니, 내 미래의 꿈보다는 내 하루하루의 일상을 행복하게 살고 싶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키우기 시작한 고양이 두 마리는 나에게 큰 위안을 줬다. 아무것도 안 하는 날 고양이와 함께 낮잠을 자면, “아, 이게 행복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는 내 첫 건전한 취미가 되었다. 나의 두 번째 취미는 바로 춤이었다. 작년부터 커플 댄스 학원에 등록해서 살사, 바차타 등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남자친구와 투닥투닥 싸웠지만, 함께 하는 공통된 취미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4년 연애에 환기가 되었다. 이렇게 일하는 게 유일한 취미였던 워커홀릭에게 하나, 둘, 소소한 취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조금씩 나를 돌아보고 돌보는 와중에 깨달았다. 아, 한국에 가야겠다. 나의 불행에도 패턴이 있었다. 2년 넘게 한국을 안 가면 무기력해지는 것이었다. 올여름 한국에 가서 쇼핑도 원 없이 하고, 부모님 사랑도 듬뿍 받고 왔더니 삶에 활력이 돌았다. 아 이 좋은 걸 왜 안 하겠다고 아득바득 버텼지.
| 벨기에에서 부활을 꿈꾸는 헤르미온느 |
나는 벨기에에서도 결국 테트리스 같은 스케줄 속에서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풀타임 한국어 수업과 행정업무, 가끔 들어오는 연주를 위한 매일의 연습, 커리어 전환을 위한 네덜란드어 인텐시브 코스, 나만의 교육 프로그램 제작. 이 삶이 결코 한국에서의 삶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찬란한 영광 없이도 나 혼자서 바닥부터 천천히 일궈내 온 내 삶을 조금 더 사랑해 보려고 한다. 내가 꿈꾸던 음악에 몰입하는 삶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목표가 아닌 내가 설계한 나만의 온전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지금이 조금 좋아진다. 가끔 내가 어쩌면 가졌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영광을 보며 괴로워하기보다는 나의 오늘을 소소하지만 알차게 꾸려가 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그 찬란한 영광의 순간을 다시 맞이하게 되겠지. 어쩌면 지금 그 순간을 살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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