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사 <중용> 1
<Tasty G 고전 칼럼 7>
자연과 문명을 고려하며 상황에 맞는 행동
자사 <중용> 1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묶어서 ‘사서(四書)’라고 한다. 사서는 12세기 이후 중국 송나라 때 등장했다. 사서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은 불교에 심취했다. 송나라의 권력자들에게는 백성을 다스릴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다. 사서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자사가 지은 중용(中庸)은 ‘중국 문명의 모든 가치를 집약한 최고의 지혜문학’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이 고전은 ‘예기(예禮에 관한 소책자 49편으로 구성됨)’라는 책의 한 챕터다. 총 33장으로 구성된 중용 제1장은 자사의 이야기다. 그리고 제2장부터 제20장까지는 공자의 이야기 모음입니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다. 그는 중용에서 “인간의 본성은 규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또한“인간의 본성은 도덕적 규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환경에 따라 변하는 과정이다.”라고 덧붙였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서술이 주요한 내용이지만 중용은 방대한 테마를 담고 있다.
중용이라 하면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떠올린다. 자사의 중용은 ‘양극단의 중간’을 의미하는 아리스토텔레스식 중용과 다르다.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자사의 중용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천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 그것을 일컬어 교라고 한다.
(중용 제1장 천명장)
중용 제1장의 천(天)은 ‘자연의 법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性)은 ‘인간의 본성’을 뜻한다. 중용의 첫 구절을 좀 더 풀이하면 ‘자연의 법칙이 인간의 본성이며, 자연은 곧 인간이다.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道)를 연마하는 것을 교(敎)라 한다.’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처럼 인간의 본성이란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 ‘중용’의 핵심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란 정해진 무언가가 아닌 ‘세계와의 교섭의 과정’이라는 것이 동양의 ‘본성관’이다. 이처럼 동양철학은 대상을, 정의 내려 명사화하기보다는 ‘oo 하는 것이 oo다.’라는 식의 서술로 그려낸다.
자사는 인간의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했다. 또한 도(道)란 ‘삶의 길’이다. ‘각자가 선택해서 만들어 가는 길’이며 ‘삶 자체’이다. 도의 속성은 ‘항상 변함’이다. 삶을 들여다보면 어느 하루 같은 날이 없다. 삶이란 선택의 연속이기에 도(道)는 곧 선택이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선택한 순간 무언가를 잃는다. 그래서 선택은 어렵다. 선택했을 때 얻는 것과 잃는 것의 이익을 따진다면 선택이 좀 더 수월할 수 있다. 도(道)를 선택이라고 해석한다면 교(敎)란 ‘좋은 선택을 위한 연마·연구·공부·노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도자야 불가수유리야 가리 비도야 시고)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군자계신호기소불도 공구호기소불문)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도가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데서 계신(戒愼 경계하고 삼가고)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공구(恐懼 몹시 두려워함)한다.” (중용 제1장 천명장)
“有敎無類(유교무류)
인간의 교육에는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논어 위령공편 제38장)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자행속수이상 오미상무회언)
공자가 말했다. 한 다발의 육포라도 가지고 와서 예를 갖추면, 나는 누구든지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다.”
(논어 위령공편 제38장)
유교라 하면 신분 차별을 떠올리기 쉽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도입해 사람을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하는 신분제도를 만들어 통치 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공자는 결코 차별을 주장하지 않았다!
동년배 혹은 같은 수준의 사람들끼리의 집단을 ‘peer group’이라고 한다. 공자시대(춘추전국시대)에 군자와 소인은 같은 peer group이었다.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기준은 신분이 아닌 ‘중용(中庸)의 실천유무(實踐有無)’였다. 군자도 중용하지 않으면 소인이 될 수 있고, 소인도 중용하면 군자가 될 수 있었다.
오규오 소라이(1666~1728)는 논어를 창조적으로 해석한 일본 에도시대의 대표적 사상가다. 그는 군자를 통치자, 소인을 피통치자라고 주장했다. 조선의 유교와 오규오 소라이 등의 영향으로 공자의 유교는 왜곡되었으며 숱한 오해를 낳았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막현호은 막현호미 고군자신기독야)
숨은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중용 제1장 천명장)
군자의 길은 고독하다. 자신의 모든 행동에 관해 홀로 책임지는 것이 군자의 길이며, 중용에서 말하는 신독(愼獨)이다. 군자에게는 타인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다. 반대로 소인은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군자의 삶과 소인의 삶 중 어떤 삶이 더 나은지 비교할 수 없다. 단지 어떤 삶을 살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대상에 이분법을 적용해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중용이 아니다.
중용은 “무엇이든지 나름의 의미가 있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군자의 삶을 원하는지 소인의 삶을 원하는지 섬세하게 세심하게 끈덕지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즉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이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화라고 일컫는다.”
(중용 제1장 천명장)
중용이란 무엇일까. 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는 중용에 관해 ‘자연과 문명을 고려하며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의 평형 상태’가 ‘중’이요, ‘감정을 상황에 맞게 표출함’이 ‘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