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사다리에서 내려와, 흙투성이 땅에서 비로소 나를 만나다
"저기, 불가리아가 어디 붙어있는지 아세요?" 화면 너머에서 낯선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세련된 런던 영어를 구사하지만,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Everly(가명). 그녀는 런던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에서 내려와, 흙먼지 날리는 동유럽의 한 작은 마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다.
Everly의 과거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그녀는 영국 금융의 심장부에서 20년 넘게 일했다. '재무 관리자'. 명함에 박힌 직함은 묵직했고, 연봉은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회상하는 런던의 기억은 잿빛이었다.
"저는 일하고, 또 일했어요. 그게 다였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지난 세월의 피로가 묻어났다. 금융가는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세상이었다. 여성으로서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선 남들보다 두 배로 증명해야 했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워킹맘'이라는 죄책감과 싸워야 했다.
"남성 동료들은 여자가 상사로 있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아이들이 커가는데, 저는 회사에 묶여 있어야 했죠.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이요?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어요."
Everly는 그 숨 막히는 트레드밀 위에서 스스로 내려오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낭만적인 휴양지가 아닌, 낯선 땅 불가리아를 택했다.
"왜 불가리아였나요?" 나의 질문에 그녀는 '땅'이라고 대답했다. 영국에서 농부가 되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지만, 불가리아는 달랐다. 그녀는 도시의 소음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다. 이웃도 없고,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곳. 그곳에서 전직 금융 전문가는 옥수수를 심고,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암퇘지 10마리로 시작했어요. 나중엔 돼지가 200마리까지 늘어났죠. 저녁이 되면 제가 소리를 질러요. 그럼 돼지들이 알아서 자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답니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어요!"
그녀는 텃밭에서 기른 채소와 과일, 직접 키운 가축으로 식탁을 채웠다. 인플레이션이 15% 이상 치솟아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는 시절, 그녀는 현명한 생존자가 되어 있었다. 기후 위기로 전 세계가 식량난을 걱정할 때, 그녀는 '자급자족'이라는 보험을 들어놓은 셈이었다.
그녀의 삶은 단순히 목가적인 전원생활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 자본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내 손으로 내 삶을 지탱하겠다는 야생의 독립 선언이었다.
하지만 삶은 동화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 몇 년 전, 그녀는 그토록 사랑하던 산속 농장을 정리하고 흑해 연안의 도시로 내려와야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크니까 인터넷을 원하고, 친구를 원하더군요. 고등교육을 위해서는 문명세계로 돌아와야 했어요."
Everly는 엄마였다. 자신의 꿈인 농부의 삶을 잠시 유예하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도시의 소음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졸업하는 2년 뒤, 그녀는 다시 시골로 들어가 농장을 시작할 거라 했다. 그녀에게 도시는 잠시 머무는 정거장일 뿐, 종착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돌아갈 땅이 있었고, 다시 꿈꿀 미래가 있었다.
"저는 불가리아 산속에서 할 일이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학교 졸업 후 처음이었죠. 그런데 그 글이 책으로 출판됐고, 지금은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 돈은 많이 벌지 못해요.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저는 '작가'가 되었는데요."
우리는 너무나 자주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배우자, 혹은 조직의 부속품으로 사느라 정작 '나 자신'을 생의 뒷전으로 미룬다. 그런 우리에게 Everly는 화면 너머로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작게라도 시작해 보세요. 아이들을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아닌, 오직 당신을 위해서요. 이번 한 번은 이기적이 되어보세요(Be selfish for once)."
그녀의 'Be selfish'라는 말은 결코 이기주의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사느라 희미해져 버린 자기 자신을 되찾으라는 조언이었다. 그녀는 런던의 빌딩 숲을 떠나 흙투성이 땅에서 스스로를 구원했다. 그녀가 불가리아의 땅에 씨앗을 심었듯, 마음속에 '나'라는 작은 씨앗 하나를 심어야 할 시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