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떠나고, 나는 대가 없는 꿈을 믿지 않게 되었다
도서관 근처에 얻은 방은 작은 창문 하나가 전부였다.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답답한 창문 너머에서 들리는 늦은 밤 라디오 소리, 물 끓는 소리,
낯선 발소리가 그날 이후로 나의 유일한 말동무였다.
밤이면 무대로 나갔다.
새벽이면 돌아와 조용히 누웠다.
나는 돌아가지 않았고, 엄마도 나를 찾지 않았다.
하지 못한 말들이 자꾸 가슴 안에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그 침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졌다.
무언의 단절.
엄마와 나는 서로를 외면한 채 헤어졌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방식의 작별이었다.
집을 나온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공장으로 향했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기계음.
그런데 손끝이 기계 발판을 밟지 못했다.
기름때 묻은 유니폼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순애 언니가 나를 불렀다.
" 명순아, 어제 괜찮았어? 요즘 피곤해 보여."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잠깐 휴게실에 앉았다.
그때 처음으로 확신했다.
' 이제 그만해야겠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 반장 언니에게 조용히 말했다.
"언니, 저... 오늘까지만 일할게요."
언니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이상하게 멀게 들렸다.
나는 미싱기름 냄새가 밴 가방을 꼭 껴안고, 공장을 나섰다.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길 위엔 조금은 다른 삶이 있을 거라 믿었다.
내가 좋아하는 기타, 노래, 사람들의 환호.
마치, 세상이 처음으로 나를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무대 위의 박수는 날 들뜨게 했고,
공장에서의 봉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돈이 손에 쥐어졌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순간들이
정말 이대로 계속될 것만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 세상 어떤 자유든, 그 반대편에는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꿈을 좇아 나선 밤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다.
밴드부 일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다.
손님들은 취해 있었고, 말보다 눈빛이 먼저 다가왔다.
술자리 제안은 일처럼 주어졌고,
거절하면 냉소가 돌아왔고, 받아들이면 수군거림이 들렸다.
어느 날, 매니저가 술잔을 내밀었다.
거절하자 얼굴이 굳었다.
" 손님이랑 건배도 못 하냐? "
그날 밤도, 무대에 올랐다. 기타 줄을 튕기며 멜로디를 맞추던 찰나,
술에 잔뜩 취한 손님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셔츠는 단추가 반쯤 풀어져 있었고, 얼굴은 불그스름했다.
한 손엔 맥주병을 든 채, 비틀거리며 무대로 다가왔다.
“야, 너 이리 와봐! 오늘 너랑 술 마실 거야!”
그 순간, 기타 줄이 팅―하며 끊어졌다.
객석이 순간 조용해졌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때 상진이 형이 내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명순아, 이게 무대야. 가끔은 줄도 끊어지고,
가끔은 손님도 막 나와. 그래도, 이건 네 무대야.”
나는 끊어진 기타 줄을 보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래요 형, 내가 선택한 무대니까.'
술 냄새가 가득한 손님이 무대로 올라오려는 순간,
상진이 형이 잽싸게 앞으로 나섰다.
" 손님, 여기 올라오시면 안 됩니다."
형은 손을 내밀지도, 밀쳐내지도 않았다.
그냥 눈을 맞추고 천천히 말했다.
나는 그 틈에,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마이크를 잡은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손끝이 떨렸고, 심장은 박자보다 먼저 달려가 버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무대는 내가 꿈꾸던 그 무대가 아니란 걸.
하지만 나는 노래를 계속 불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으니까.
그건 꿈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몸짓에 가까웠다.
온 세상이 나를 환영해 줄 것만 같은 순간들은
이내, 세상 어디에도 나를 품어줄 곳 없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기타를 안았다.
여전히 내 손에 맞았고,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다.
무대가 끝난 뒤 분장실 거울 앞에 앉았다.
립스틱을 바르고, 속눈썹을 올렸다.
거울 속의 내가 낯설지 않았다.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고,
누구도 묻지 않았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또 하나의 밤이 시작되었다.
익숙한 무대, 익숙한 조명, 익숙한 곡.
그 안에서 나만 점점 낯설어졌다.
손님은 웃었고, 박수를 쳤고, 술잔을 흔들었다.
나는 노래를 불렀지만, 그 노래 안에는 내가 없었다.
가사는 기억났지만, 감정은 잊혔다.
형들은 익숙해진 나의 무대를 보며 농을 던지곤 했다.
" 명순이, 요즘 물 올랐어."
나는 살짝 웃었다.
그 웃음 안에 대답을 감췄다.
무대는 익숙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외로웠고 불안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무대가 끝난 뒤, 상진이 형이 조용히 다가왔다.
" 명순아."
"... 응? "
"오늘, 잘 버텼다. 버티기 힘들면 언제든 말해. 너 혼자 견디려고 하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괜찮아요 형. 혼자 익숙해져야죠."
형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에 따뜻한 커피를 쥐어주었다.
그 손끝에 닿는 온기가
오늘 하루의 유일한 위로였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
그 순간을 견디는 것이, 오늘의 나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지만, 나는 내 노래를 듣지 못했다.
불빛 아래의 나는 웃고 있었지만, 그 안은 비어 있었다.
그 침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졌지만, 나는 또 하루를 버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