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튀기고 가슴이 옥죄이는 장르 슬래셔가 튀기고 가슴이 옥죄이는 장르
동물은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두려움과 공포라는 감정은 우리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오지만
그것이 해소되면 느껴지는 카타르시즘은 그 어떠한 순간보다 강력하다.
이것을 우리는 스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스릴을 즐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같은 맥락으로, 공포영화도 마찬가지다.
공포영화는 단순하게 하나의 장르로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공포영화라는 장르는 하나의 줄기로, 그 옆에는 수많은 가지들이 쳐져있다.
사람마다 공포를 느끼는 방식은 다르고, 그 방식을 끊임없이 변주하여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초자연적인 것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 무서운 사람에게 느끼는 것에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각각 오컬트 장르와, 스릴러 장르로 세분화 되었다.
이번에는 우리는 공포 중에, 사람이 느끼는 가장 현실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살인에 대한 공포를 다루려고 한다.
이 살인에 대한 공포도 세부장르가 다양하다. 단순히 살인마에게 쫓기기만 하는 추격 장르, 그 살인마를 쫓아가며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추리극과 형사극, 그리고 누군가를 죽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주는 슬래셔 등 수 많은 세부 장르가 존재한다.
그 중에 가장 단순하고, 큰 공포를 유발하며 살인에 대한 공포와 살인에 주는 쾌감을 동시에 주는 슬래셔 장르를 다뤄보려고 한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이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지만,
그 감정이 해소되는 순간, 우리는 카타르시즘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스릴이라고 표현한다.
이 스릴을 즐기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공포영화도 이와 같은 원리로 호불호가 갈리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소비되고 공급되는 이유가 바로 강한 스릴을 제공하기떄문이다.
우리는 종종 무서운 영화를 단순히 ‘공포영화’라는 하나의 장르로 뭉뚱그려 말하곤 하지만
사실 공포영화는 단일 장르가 아니다.
공포라는 뿌리에서 파생된 수많은 가지들이 존재한다.
사람마다 공포를 느끼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반영해 장르는 끊임없이 변주되며 세분화되었다.
예를 들어,
초자연적인 현상에 공포를 느끼는 이는 오컬트를,
잔혹한 인간에게서 공포를 느끼는 이는 스릴러를 선호한다.
죽음을 예고하는 것에 무서움을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 자체에 매혹되는 이도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살인에 대한 가장 본능적인 공포, 그리고
살인의 쾌감과 공포가 동시에 작동하는 장르, 바로 슬래셔를 다뤄보고자 한다.
슬래셔는 단순하다. 미약한 이유로 누군가에게 살해 당하거나, 무참하게 살해하거나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 가장 원초적인 공포가 숨어 있다.
살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장면을 관음하며 지켜보는 쾌감.
이 이중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바로 슬래셔의 매력이다.
# 슬래셔 무비란? (장르 분석), 우리나라 슬래셔 무비는 왜 존재하지 않을까
‘슬래셔 장르’는 살인마가 칼이나 도끼, 전기톱 등 날붙이 무기를 이용해 희생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공포 영화다.
이 장르의 핵심은 살해당하는 공포와, 살해하는 쾌감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에 있다.
다른 공포 장르보다 직접적이고 선정적이며 날것의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크고,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조차 이 장르만은 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만큼 슬래셔는 열성적인 팬층을 가진 장르이기도 하다.
슬래셔의 시초로는 흔히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 가 언급된다.
물론 <사이코>는 슬래셔뿐만 아니라 공포, 스릴러, 나아가 영화 전체의 문법에 영향을 미친 영화사적 걸작이다.
이 작품에서 파생된 장르적 요소는 이후 <할로윈> 을 통해 본격적인 슬래셔 영화의 형식으로 정립된다.
이 시기 만들어진 클리셰와 규칙은 지금까지도 장르의 골격으로 활용되고 있다.
# 왜 사람들은 단순히 살인만 반복되는 영화를 좋아할까?
살인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가장 강한 심리적 장벽 중 하나다.
도덕, 윤리, 감정의 억제 등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타인을 해치는 행동을 상상조차 금기시한다.
하지만 슬래셔 영화는 이 금기를 대신 넘는다.
우리가 결코 실제로는 실행할 수 없는 폭력과 죽음을, 제3자의 시선으로 체험하고 감정 해소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장르는 살인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절대 하지 못할 행위를 타인을 통해 대신 겪으며 쾌감과 카타르시스를 얻는 심리적 장치다.
폭력적 게임이나 범죄 다큐를 보는 심리와도 유사하다.
따라서 슬래셔를 즐기는 것 자체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시선은 단선적인 편견이다.
이 장르는 오히려 금기의 해소와 감정의 방출이라는 측면에서 기능한다.
# 그렇다면, 왜 한국에는 슬래셔 영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을까?
전 세계적으로 슬래셔 장르 팬층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장르 중심의 작품을 찾기 어렵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문화적 정서
한국은 잔혹한 신체 훼손을 불쾌하게 여기는 문화적 경향이 강하다.
특히 살인을 피해자의 고통 중심으로 다루며,
가해자의 시점에서 쾌감을 보여주는 방식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금기로 여겨진다.
2. 검열과 등급 분류의 장벽
슬래셔는 대부분 성인 관람가 혹은 제한상영가를 받는다.
하지만 한국은 타국에 비해 등급 분류 기준이 엄격하고, 사전 검열에 가까운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 중이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가 대표적인 예다.
이 영화는 슬래셔 장르도 아니고, 오히려 감정 중심의 스릴러에 가까운데도,
잔혹성을 이유로 두 차례 등급 거부를 받아 상당 부분 삭제 후 개봉해야 했다.
그만큼 한국에서 잔혹성을 표현하는 영화는 시스템적으로 불리하다.
3. 산업적 구조
슬래셔는 보통 저예산 장르지만,
그에 비해 관객 수는 제한적이고 등급 리스크는 크다.
즉, 하이리스크-로우리턴 장르에 가깝다.
대기업 중심의 한국 영화계에서는 쉽게 기획조차 되지 않는다.
4. 정서적 접근의 차이
한국의 공포영화는 귀신, 저주, 복수 같은 정서적 공포에 익숙하다.
슬래셔처럼 이유 없는 죽음보다,
왜 죽었는가에 집중하고,
남겨진 자의 슬픔이나 죄책감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
# 앞으로도 불가능할까?
현 시점에서 극장 개봉용 슬래셔 영화는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OTT 플랫폼의 성장과 자율심의 체계가 정착되면서,
슬래셔 장르에 대한 시도는 조금씩 가능해질 수도 있다.
또한 영화계 전반이 침체되고 투자자들이 이탈하고 있는 현재,
적은 예산으로 강렬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슬래셔는 오히려 매력적인 장르가 될 가능성도 있다.
단, 이 장르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한국 정서에 맞는 '슬래셔화'가 필요할 것이다.
# 반복되는 죽음과, 작품성의 부재
슬래셔 무비는 팬층이 두텁지만, 안타깝게도 평론가들의 평가는 매우 박하다.
도대체 왜 평론가들은 이토록 재미있는 영화들을 낮게 평가하는 걸까?
그 이유는 장르의 변주 없이 반복되는 복제작에 대한 흥미 상실 때문이다.
일반 관객은 마케팅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슬래셔 영화 위주로 접하지만,
평론가들은 이름 없는 작품부터 고전, 해외 독립작까지 폭넓게 접한다.
그렇기에 아무리 흥행한 영화라 해도, 기시감이 강하고 단순한 복제물이라면 높은 평가를 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웹소설 기반의 판타지 웹툰을 보며 공장식 콘텐츠라고 비판하는 것과 비슷하다.
문제는 슬래셔 장르의 구조적 특성상 변주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오컬트 장르처럼 지역적 신화나 이국적 토속 신앙을 도입하거나,
스릴러 장르처럼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기도 어렵다.
슬래셔 장르는 기본적으로 ‘살인자’, ‘희생자’, ‘추격전’이라는 고정된 3요소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뼈대 안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주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슬래셔이기 때문에 박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무의미한 잔혹성과 반복성 때문이지, 장르 자체에 대한 혐오나 편견 때문은 아니다.
실제로 슬래셔의 문법을 해체하거나 변형한 영화들은 평론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예를 들어 슬래셔를 해체한 <스크림>, 타임루프 구조를 차용한 <해피 데스데이>, 장르 전체를 비틀며 메타적 쾌감을 준 <캐빈 인 더 우즈> 등이 그렇다.
이 작품들은 슬래셔의 틀을 유지하되,
새로운 감각과 장르적 실험으로 관객과 평단 모두를 만족시킨 보기 드문 사례다.
그러나 최근의 많은 작품들은 틀에 갇힌 죽음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안에서 작품성은 사라지고, 자극만 남게 된다.
슬래셔 장르의 팬층조차도 이 반복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다.
결국, 변화 없는 장르는 쇠퇴한다.
슬래셔는 본래 저예산, 고자극의 장르였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것만으로 관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장르 혼합과 트렌드 민감성, 이야기 구조의 변주와 실험이 없다면,
슬래셔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더 이상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외면의 장르가 될 것이다.
앞으로의 슬래셔 영화들이 쾌감과 작품성을 동시에 아우르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길 기대한다.
이 3작품에 대해 기회가 된다면, 어떻게 슬래셔 장르를 변주했는지에 대한 비교문을 작성해보도록 하겠다.